** 흑진주를 길러낸 아버지 **

2015.06.12 08:56

김승훈(41) 조회 수:1998


1980년 여름 LA의 흑인 빈민가 캄튼에 살고 있던 리처드 윌리엄스라는 흑인이 TV에서 여자테니스 경기를 보다가 우승자가 4만 달러의 상금을 손에 쥐는 것을 보고 놀랐다. “라켓 몇 번 휘두르고 4만 달러? 그것 참 괜찮은 비즈니스네. 나도 딸을 낳아 테니스선수로 키워야 겠다”고 결심했다. 이 경기는 솔트레이크 시티 인비테이셔널이었으며 우승자는 루마니아의 버지니아 루지치였다.

윌리엄스는 다음날 헐리웃에 있는 파라마운트 스포츠로 달려가 사정했다. “쓰던 라켓 두 개와 쓰던 볼 한 상자를 나에게 좀 싼 값으로 주시오”라고 말하자 상점주인인 빌 하지스는 라켓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윌리엄스는 “사이즈요? 그건 잘 모르겠고 내가 앞으로 태어날 딸에게 테니스를 가르쳐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위해서, 더구나 캄튼의 흑인빈민이 테니스를 시작하겠다는 결심에 감동해 상점주인은 윌리엄스의 청을 들어주었다.

리처드 윌리엄스는 그해 딸을 얻었고 다음해에도 또 딸을 낳았다. 두 딸의 이름은 비너스 윌리엄스와 서리나 윌리엄스였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여자 프로 테니스계에 군림하고 있는 윌리엄스 자매다. 왓츠 폭동과 한인이 당한 4.29폭동이 일어난 LA의 사우스센트럴 지역에서 세계적인 흑인 테니스 스타가 배출 되었다는 것은 거의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는 공원의 테니스장에서 딸들을 가르치다 마약 거래하는 갱들에게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집에 들어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딸들을 데리고 테니스장으로 나가며 부인에게 남긴 인사는 항상 “안돌아오면 죽었는 줄 알아”였다고 윌리엄스 자매는 회고하고 있다.

리처드 윌리엄스가 쓴 ‘내가 경험한 흑과 백’이라는 자서전에 의하면 흑인이 백인문화가 지배하는 테니스계에 진출하는 것은 연습에서부터 우승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2001년 팜 스프링스의 부촌에서 열린 인디언 웰스 오픈에서 아버지와 딸들이 경기장에 나타나자 백인 관중들은 “니거(nigger), 니거 고 홈!”을 외친 모욕적인 장면을 꼽고 있다.

서리나는 8살 때 TV에서 프렌치 오픈을 보면서 “나는 언젠가 프렌치 오픈의 우승자가 될 것이며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 불어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친구들에게 선언했다. 모두 웃었다. 그러나 지난주 프렌치 오픈에서 체코의 사파로바를 꺾고 서리나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수상소감을 말한 후 성조기가 올라가며 미국국가가 울려 퍼지던 장면은 감격적이었다. 남자부에서 조코비치가 바브링카에게 패해 그랜드슬램을 놓친 것도 화제지만 LA에 사는 나에게는 캄튼 빈민출신 서리나의 우승이 더 감격적이었다.

그녀는 가장 나이 많은 여자프로(33세)인데도 윔블던 등 메이저대회만 20승을 달성해 테니스 여왕 마티나 나브라틸로바의 기록(메이저 18승)을 깼다. 테니스로 7,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최고상금 기록자이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커리어 팜비치 부촌에 살고 풋볼 팀 마이애미 돌핀스의 공동 구단주다. 테니스 하나로 인종적인 벽을 허물고 부자가 되었다.

윌리엄스의 스파르타식 딸 훈련은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흑인이 백인세계를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성공비결은 간단하다. 목표를 세운 다음 죽기 살기로 밀어부쳐라. 그러면 미국에서는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두 딸이 그 본보기라고 했다. 캄튼의 빈민 윌리엄스 가족이 마이너리티에게 남긴 교훈이다.


<이철 칼럼>에서 모셔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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