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선
【유 노 굿 / 이선】

나는 미국에 오기 전에는 모터미싱을 한 번도 만져 본 일이 없었다. 사십이 넘어 이민을 오게 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외국에 좋은 학교가 있으니 미리 아이들을 보내 폭넓은 경험을 갖게 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큰 애가 미대 지원을 위해 준비를 하다 보니 비용 면에서 한국보다는 차라리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외국의 사립학교로 두 아이를 떠나보냈다. 아이들을 유학 보낸 지 일 년 반쯤 되었을 때 IMF가 터졌다. 830원 하던 환율이 2,300원까지 올랐다. 정신이 없었다. 환율이 오르기 전에는 내 수입만 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문제가 달라졌다.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있던 차에 3배의 돈을 마련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벗어난 학교환경에 자율적으로 적응도 잘하고 만족해하는 아이들 미래를 생각해 볼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미국 이민이라는 결론이 났다. 이제 좀 안정되어 살만한 나이에 산 설고 물선 미국행이라니? 꼭 고생을 사서 해야 겠냐는 친정과 시댁 식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아이들 교육이 우선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미국의 도시는 북가주 산호세였다. 아파트에 짐을 풀기 무섭게 우선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기에 카페테리아의 주방보조로 들어갔다. 다른 식당에서는 일회용 용기를 쓰는 곳도 많았지만 카페테리아 주인은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를 내려고 무거운 사기 접시를 사용했다. 샐러드바 정리를 시작으로 다섯 가지 수프에, 메인 음식 세 가지를 만들어 주문대로 내놓고 나면, 그릴로 옮겨 마무리를 해야 했다. 그 후엔 산더미 같이 쌓인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거의 초주검이었다. 여덟 시간 이상을 꼬박 서 있어야 했고, 장화를 신고 뜨거운 물일을 하다 보니 발가락에 통풍이 되지 않아 병이 들기 시작했다.

검게 변한 발톱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남편은 미안하고 안쓰러워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든 자신이 책임질 터이니, 더는 카페테리아에 나가지 말라며 일방적으로 주인에게 통보를 넣어버렸다. 물일을 중단하니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더 병이 진전 되지는 않았다. 슬슬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마침, 어린 나이에 재단부터 시작해 양장점을 경영하며 평생 바느질로 먹고살았다는 여자가 한국서 이민을 왔다. 양장 기술로 집나간 남편 대신 아이들을 키워내고 집까지 장만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바느질을, 나는 대신 그녀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이민 오기 전 운전대 한 번 잡아본 일이 없었고 게다가 영어 한마디 못하는 그녀는 하루에 80불씩 하는 교습비가 아까웠는지 나에게 바짝 매달렸다. 사십대 후반의 감각 없는 초보아줌마에게 운전을 가르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네 골목길에서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 밤늦은 시간까지 운전연습을 시켰다. 그녀는 반대편에 차만 나타나면 겁에 질려 두 발을 달랑 들어서 사람을 놀라게 했다. 큰길로 나와 주행연습을 할 수 있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미리 시험 장소의 코스와 시험관이 무엇을 지시하는 지 알아내기 위하여 도로주행 코스를 자세히 살핀 후, DMV에서 시험을 보지 않는 새벽과 오후 그리고 휴일 시간을 이용해 실제 장소에서 수도 없이 연습을 시켰다.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는 주차했다가 방향을 바꾸어 빠져나가기를 거의 수백 번 연습시킨 후에야 운전면허증을 그녀 손에 쥐어 주었다.

본격적인 수선업을 시작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미싱을 구입해 왔다. 그런 나는 아직 거처조차 마련하지 못해 친척집 거라지를 빌려 공장으로 쓰고 있는 그녀 기계들 옆에 내 미싱을 들여놓았다. 그녀는 집주인에게 눈치가 보이는지 운전면허를 따게 해주면 옷 수선을 가르쳐 준다던 약속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 미싱을 집으로 가져가라고 했지만 몇 마일이나 떨어진 내 아파트에 갖다 놓고 일을 배울 수는 없는 일이기에 못 들은 척 해버렸다.

생전 처음해보는 모터미싱은 제 멋대로 우르르, 달아났다. 기본적인 똑바로 박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때 알았다. 줄무늬가 있는 와이셔츠를 가져다가 줄을 따라가며 박았다. 잠자는 일도 접은 채 하루 15시간 이상 매달렸다. 하얀 셔츠가 검은 옷이 될 때까지, 검은 치마가 하얀 치마로 바뀔 때쯤, 나는 10년 경력이라는 문구를 넣어 한국 신문에 광고를 냈다. 스탠퍼드 대학 앞에 있는 세탁소에서 연락이 왔다. 고급 재킷의 소매 줄이는 일과 런던 퍼그 바바리 기장 줄이는 일, 그리고 바짓단을 줄이는 일이 처음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들어와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런던 퍼그 바바리는 소매에 고리까지 붙어있어 어떻게 줄여야 할지 난감했다. 옷을 뜯어 재단하고 잘라내 다시 붙여 원래의 모양대로 만들어주는 것이 수선일의 정석이다. 그런데 일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옷에 가위를 대고 자르려는 순간의 그 아찔함! 떨리는 손을 감추고 자르긴 했으나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고급 재킷의 시접 부분을 두지 않고 팔 기장을 그대로 잘라 버렸다. 결국 팔 길이보다 2인치를 짧게 자른 것이다.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막다른 골목, 피할 구멍은 있는 것인가? 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흘깃거리며 묘한 웃음을 짓던 나의 옷 수선 선생의 여유. 마감 한 시간을 남겨놓고 까맣게 타버린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는 잘린 부분을 감쪽같이 붙여주었다. 그리고 스팀다리미로 안쪽을 눌러서 기장을 맞춰 주었다. 다행히 그 재킷은 헝겊의 조직과 무늬가 복합적으로 짜여있어서 이음질을 해도 표시가 나질 않았다. 그 후로는 절대로 시접을 두지 않고 가위를 대는 일은 없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살얼음판을 건너야 하는 실무 앞에서 아무리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일이라도 5번 이상 확인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난 후 앞이 막힌 스웨터를 잘라 긴 지퍼를 달아달라는 일이 들어왔다. 초보자에게 지퍼 바꿔다는 일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헝겊 조직이 흐물흐물한 스웨터에 쇠 지퍼를 다는 일이어서 난감했다. 가지고 온 날부터 사흘 동안 붙였다 뜯기를 반복하며 지퍼를 겨우겨우 달아 올려 보았지만 결과는 우글쭈글 틀어지기만 했다. 양쪽을 똑같이 맞출 실력이 없으니 당연했다. 걱정이 앞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이룰 수 없었다. 이제 돌려주어야 하는 시간이 두 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어찌 한단 말인가. 옆에 있는 그녀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너 골탕 좀 먹어 보라는 것인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일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에게 내 일까지 도와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 이렇게는 도저히 할 수 없겠다는 절망이 몰려왔다. 다시 실을 걸어 지퍼를 스웨터에 대고 바늘을 내려박으려는 순간, 재봉틀 바퀴가 재빠르게 돌면서 바늘이 엄지손톱을 뚫고 박혀버렸다. 삽시간에 손톱이 새까맣게 죽더니 피가 솟고 손톱 밑이 빠르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사고로 나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손에 박힌 바늘을 빼고 여러 대의 주사까지 맞는 등 한동안 몹시 힘든 날들을 보내야 했다.

차차 옷 수선에 쥐꼬리만 한 경력이 쌓일 때쯤 산호세에서 얼바인으로 이사를 했다, 역시 이사짐을 풀기 무섭게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잡 구하는 광고를 신문에 냈더니 세탁소에서 연락이 왔다. 헐레벌떡 달려간 나를 주인 여자는 아래위로 찬찬히 훑어보더니, 옷 수선은 물론이고 손님과 대화할 정도의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 말에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미싱이나 기계들이 내 맘에 들면 일을 하겠다는 말로 영어가 서툰 위기를 넘기고 기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주인 써니는 한국 여자였는데 성격이 워낙 깔끔해서 기계는 잘 청소되어 있었다. 주인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사람을 불러 기계를 점검한다고 했다. 내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늘 그렇게 고장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년간 1,200불이나 되는 돈을 미싱 수리비로 쓰는 셈이다. 나는 내가 만일 일을 하게 된다면 그 비용을 하나도 들이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혹했는지 나는 취직이 되었다.

일을 하면서 내가 손님 주머니에서 나온 돈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은 삼개월이 지나자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다. 옷 수선 수입의 절반을 그대로 주고 카운터에서 일한 것도 계산해 줄 터이니 자기가 일찍 가야할 일이 생길 때, 그리고 아침에 문도 열어주고 카운터도 봐 달라는 얘기였다. 아무리 친한 친척 친구를 써봐도 현금이 비어서 함부로 카운터는 맡길 수 없다고 사정을 했다. 몇 달을 지켜봤는데 손님 주머니에서 나온 적은 돈까지도 티켓에 붙여놓는 것을 보고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데 화가 났다. ‘돈 5불 가져가고 도둑 소리를 들을까, 가져가려면 큰돈을 가져가고 도둑 소릴 듣지’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다음 날, 정말 손님 주머니에서 큰돈이 나왔다. 980달러. 옷 주인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을 넣자마자 당장 달려왔다. 허겁지겁 가게로 뛰어든 손님은 누가 훔쳐간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뒤로 이 손님은 나에게 팁을 주고 옷 수선도 맡기고, 먹을 것도 챙겨다 주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써니는 이제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있겠다면서 세탁소 키를 넘겨주었다. 컴퓨터 일은 할만 했지만 손님과의 대화가 문제였다. 손님이 오면 인사를 하고 전화번호를 물어 기록된 카드를 찾아 세탁이나 수선할 옷을 일일이 세어서 기록하여 티켓을 끊어 주는 일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써니처럼 손님과 농담을 한다거나, 카운터 일 이외에 다른 것을 물어온다면 나는 그대로 얼음이 돼버리는 것이었다. 세탁소를 드나드는 손님들이 믿음이 가고 친해지면 한참을 서서 수다들을 떨면서 친구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나는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어렵게 취직을 하고 카운터까지 봐가며 수입을 늘려가고 있는 차에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곧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남편의 수입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계속 부닥쳐 보자고 마음을 다졌다.

자폐증 아들을 데리고 오는 UC 얼바인 교수가 있었다. 그 아이가 여기저기 만지고 부산을 떨어도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영어에 자신이 없으니 무조건 ‘땡큐’라는 말을 많이 썼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땡큐’를 남발했다. 그래서 그런지 교수님은 아주 친절하게 나를 배려해 주었다. 무언가를 설명하는데 잘 들어보니 ‘대장금’에 관한 드라마 얘기였다. 내가 말도 안되는 영어로 맞장구를 쳐주었는데도 그는 매우 기뻐했다. 코리안 레이디들이 아주 예쁘다면서 올 때마다 드라마 얘기를 하는 바람에 말대꾸를 하기위해 집에 돌아와 물어보았다. 내 말에 아이들은 깜짝 놀라며 그런 말을 엄마가 어떻게 했느냐고, 너무 웃긴다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교수의 말을 잘 듣고 있다가 어느 하나를 잡아서 말이 되던 안 되든 용감하게 대화를 했다. 그는 인품이 좋은 사람이어 서 어설픈 내 영어를 정성을 다해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는 너와 말이 통해서 기쁘다며 옷을 가지고 돌아갔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가며 겨우겨우 카운터를 보고 있는 어느 아침, 한 건장한 백인이 세탁소 안으로 쑥 들어왔다. 언젠가 써니가 그 백인에 대해 말하는 소릴 들었는데, 저 녀석은 돈도 많으면서 쩨쩨하게 몇 푼까지 꼭 센트로 준다며 덩칫값도 못한다는 말이었다. 써니가 늘 정성을 다해 여러번 시도하면서 다른 세탁소에서는 빼지도 못하는 실크 셔츠의 얼룩을 빼주어도 늘 당연하다는 듯 감사할 줄 모른다고 했다. 일미터 구십 정도의 큰 키에 노랑콧수염, 그리고 전형적인 백인 스타일에 타미 바하마 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 세탁소는 주로 백인들이 손님인데, 그것은 써니가 고급 옷의 얼룩을 잘 빼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손님들의 농담을 받아줄 정도로 영어에 능통하고, 한껏 그들과 수다를 떨고 비위를 맞춰준다. 실리에 밝은 백인들이 올 때는 다 이유가 있다. 대개의 백인들은 아주 친절하고 나이스하지만 사건이 벌어지면 곧 코트에 고발한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써니는 미리 옷을 받을 때 최선을 다해본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여간해서 주인은 손님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을 잘하지 않고, 백인들이 검소해서 이 나라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고 나에게 늘 말하는 편이라 좀 비위가 거슬리는 때도 많았다. 나는 백인들이 다 낡아서 곧 찢어질 셔츠를 기어달라는 통에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간직하고 싶다지만, 다 낡아 해어진 곳에 새 천을 대고 깁다 보면 곧 낡은 옆 부분이 또 찢어지는데도 고집을 한다. 그러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찢어진 것을 갖고 와 또 고쳐달라 한다.

노랑콧수염은 내 앞에 큰 기둥처럼 섰다. 나는 “굿 모닝”하고 인사부터 했다. 그는 “I’m fine and you?” 했다. 나는 “굿, 폰 넘버 프리즈”하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전화번호를 입력했지만 컨베이어에 넣어둔 번호가 뜨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아직 나오지 못한 옷들의 티켓을 살피기 시작했다. 몇 가지가 스팟이 빠지지 않아 다시 빤다는 빨간 팬으로 써진 티켓이 앞쪽에 걸려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사정을 말했다. “네 셔츠 3개가 실크인 데다가 스팟이 많아서 다시 세탁해야 해서 지금 나오지 않았다”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오늘 꼭 입어야 하는 옷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What?, What?” 하며 급기야 두 손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으쓱 올려가며 노골적으로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한다는 듯, 떳떳거리며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데다 야유까지 당하자 더욱 당황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속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나는 황당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생각한 끝에 써니에게 전화를 걸어 바꿔주었다. 써니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전화기 밖에까지 들려왔다. 그는 전화 통화를 끝내고 또 야유를 퍼부으며 세탁소를 나갔다. 얼마 후 써니가 세탁소로 들어오는데 눈치가 보였다. 나는 온종일 입을 꽉 닫은 채 말없이 일을 끝내고 집으로 왔다. 식구들 앞에선 아무 일 없는 척했지만,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처음에 주인이 손님들에게 일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구사해야 채용할 수 있다는 말에, ‘밤을 새워서라도 일만 완벽하게 해 놓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주인은 그동안 나 모르게, 내가 해놓은 일을 샅샅이 뒤져보고 실 색깔이며 오바락 친 것까지 일일이 점검하고 있었다.

점차 백인들 사이에 길 건너편 수선전문집보다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났다. 당시 UC얼바인 학생들 사이에서 청바지 오리지날 햄이 유행했다. 감쪽같이 밑단을 뜯어서 표시가 나지 않도록 이어 붙이는 것으로 청바지의 멋스러운 밑단을 그대로 만들어주는 것이 학생들이나 까다로운 손님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일반 청바지 햄보다 수선비도 갑절을 받을 수 있어서 주인도 무척 좋아했다. 400불씩이나 하는 꽤 비싼 청바지에 오리지날 햄을 처음 시도해서 대박을 친 것이었다. 구멍 낸 바지를 어떻게 감쪽같이 고쳐줄까 연구하다가 우연히 밑단을 뜯어서 붙여주었는데, 손님들이 “미라클, 미라클” 감탄을 연발하는 것을 응용했다. 단골이 꽤 많아졌다. 완벽주의자인 주인은 웬일인지 다른 세탁소 주인들과는 달리 옷 수선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다른 세탁소 주인들은 쉽게 돈이 되는 바짓단 고치는 것은 주인이 다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실력이 없어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려운 수선 일들만 종업원에게 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혜택이 그나마 내가 카운터를 보는 어려움을 참아가며 세탁소에서 일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노랑콧수염은 주로 내가 혼자 있는 월요일이나 화요일 이른 아침에 왔다. 내가 어지간히 당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써니는 서둘러 그가 오기 전에 깨끗이 세탁한 모든 옷을 꼼꼼히 챙겨두었다. 그날도 역시 노랑콧수염은 39센트 잔돈을 짤랑거리며 계산을 하고 돌아가면서 아주 불쾌하게 세탁소를 나갔다. 옷도 완벽하게 다 나왔고, 스팟도 깨끗하게 다 빠졌으니 달리 흠 잡을 것이 없었지만 여기저기 까다롭게 살펴본 후 나를 빤히 쳐다보고 “You no good”하며 묘한 웃음을 날리며 쌩하니 옷을 챙겨 들고 나갔다. 써니가 들어서면서 좀 침울한 나를 보더니, 컨베이어를 돌려 그가 왔다 갔는지를 확인했다. 이어서 노랑콧수염의 티켓이 맨 위에 놓인 것을 확인한 주인은 “조금 전 다녀갔구먼.” 하면서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사람과 월남 사람이 다른 것은 이민생활을 시작할 때 월남 사람들은 영어부터 배운다는 말을 돌려서 내게 했다. 나는 솔직히 영어도 영어였지만 운전면허증이 더 문제였다. 처음 미국에 들어와 받은 운전면허는 이미 사용기간이 끝났다. 신청한 영주권이 늦어지는 바람에 한국에서 발급받은 국제운전면허증을 사용하고 있는데 국제운전면허도 더는 갱신이 불가능한 세번째 연장이었다. 이런 상황을 언제까지 견디어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질 않았다.

세탁소 주변에는 티 집을 운영하면서 식사도 팔아 제법 수입을 올리는 중국인 남매들, 카밥 집을 하면서 절절매고 있는 중동사람, 직접 바게트를 구워 샌드위치를 만들어 파는 월남 사람, 그리고 한국 사람이 주인인 요거트 집이 있는데 때마침 아이스크림 대신 다이어트 식품으로 소문난 요거트가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늘 긴 줄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발레학원에는 엘에이레이커스의 코비가 가끔 딸아이들을 라이드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종종 코비를 보았다며 호들갑을 떨며 들어오는 손님도 있었다. 이렇게 다들 자기 사업에 열심들을 내고 있는데 나는 신분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언제 이 땅에 마음 놓고 살아가게 될지 막막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뿌리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가뭄을 해결해 줄 비가 기대와는 달리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이었다. 딸아이가 지원한 대학에 제출할 포트폴리오와 그림이 없어졌다. 대학 진학을 위해 4년간 준비한 것이었다. AP 클래스 심사를 위해 뉴욕에 그림을 보냈는데, 다른 아이들 것은 모두 돌아왔으나, 딸아이 것만 감쪽같이 없어졌다.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실력을 입증할 그림과 포트폴리오가 없다면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 학교에서는 UPS를 통해 발칵 뒤지고 난리가 난 눈치였지만, 애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미술 선생을 통해 통보해왔다. 급기야 변호사를 만나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면담을 다녀온 후엔 더 기가 막혔다. 정부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일인데, 당신 돈이 싸울 만큼 있느냐는 것이었다. 진즉에 포기하라는 권고였다. 미술 선생은 네 딸이 소질도 많고 대학을 가려면 아직 3개월 정도나 시간이 남아 충분하니 다시 그려서 지원하라고 회유를 했다. 이민자의 삶에 파생되는 문제들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을 눈치 챈 아이는 학원에서 포트폴리오 준비하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온 힘을 다해 꼼꼼히 준비해 왔었다. 가뜩이나 학원도 못 보내고 혼자 준비하는 녀석이 안쓰러웠는데 그림마저 잃어버리고 닭 쫓던 개 신세가 돼버린 것이다. 학교 출석은커녕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딸아이를 두고 출근하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미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을 쒀놓고 아이가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기를 바라며 출근한 월요일 아침, 노랑콧수염이 문을 거칠게 열고 비를 털면서 들어왔다. 나를 보더니 잔뜩 이마를 찌푸린 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긴장한 나는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폰 넘버 프리즈”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는 “You don’t even say hi?”하고 입을 씰룩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인사도 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된 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굿모닝” 했다. 그는 어깨만 들썩하고 올렸다 내렸다. 이어서 노랑콧수염은 “You speak like a machine”이라고 말하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사실 그 말은 맞다. 사람들이 들어오면 매번 똑같은 말로 순서 하나 바꾸지 않고 기계처럼 사무적으로 말했다. 나는 다른 말을 하고 싶어도 내가 하는 말이 혹시 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 시도를 하지 못했다. 점점 더 조여 오는 긴장으로 어디론가 숨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노랑콧수염이 “You are in America, you should speak English, but”이라며 입을 삐쭉거렸다. 나는 못들은 채 하며 또 다시 “폰 넘버 프리즈” 했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얼른 깨끗하게 스팟이 빠진 옷들을 내어주면 돌아가겠지 하는 마음만 생겼다.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번호 불러주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노랑콧수염은 “You speak like a baby”라며 아주 천천히 아이에게 하듯 숫자를 하나하나 불러주기 시작했다. 다른 손님들은 “익스큐즈미”하고 다시 물어보면 대개는 친절하게 다시 가르쳐주는데 이 작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처럼 사람을 억누르고 있었다. “You speak like a bird”라고 다시 말하며 노랑콧수염은 손을 들어 입에다 대고 짹짹거리는 흉내를 내며 아예 무시하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해있어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 정말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노랑콧수염 앞에서 더는 비참해진 나 자신을 보일 수 없어진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여기서 너 울면 진다.’ 어떻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나중에 보니 검게 피멍이 맺혀있었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하고 ‘넌 잘할 수 있어’라고 큰소리로 다섯 번을 말하고 나자 정신이 돌아왔다. 다시 카운터로 걸어가 “쏘리”하고 말하고 전화번호를 찍었다. 컴퓨터에 적혀진 컨베이어 번호를 돌리기 시작하는데 다시 녀석이 나를 흉내 내며 “You are stupid” 하며 가운뎃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뭐? 아임 스투핏? 유 아 모얼 스투핏!” 나도 눈을 부릅뜨고 덤벼들었다. 할테면 해봐라. 너 오늘 잘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터질 곳을 못 찾았는데 그래 한번 해보자. 꼼짝없이 당하기만 하던 내가 거칠게 나오자, 녀석은 깜짝 놀라 노려보면서 “You are fucking stupid go back to your country” 하면서 다시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들었다. “뭐? 고우 백? 네가 뭔데 고우 백해라 말아야? 이 자식이 정말!” 정신이 번쩍 났다. 미국 사람만 보면 웃거나, 땡큐 외에는 고개를 숙이고 다녔는데 이제는 더 이상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속에서 그런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네가 나가, 유 고우 백! 나가, 겟 아웃! 겟 아웃!” 나는 발로 바닥을 쾅쾅 차면서 손까지 거칠게 내두르며 당장 쫓아낼 기세로 “내가 요만한 일로 쫓겨날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내가 먼저 널 당장 여기서 쫓아내야겠다며 “겟 아웃!” “겟 아웃!” 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나를 노려보며 “You no good”하고 검지손가락질을 했다. 무슨 판결이라도 내리듯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지지 않고 둘째손가락을 총처럼 겨누며 “유 노 굿, 유 리얼리 노 굿!”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 써니가 갑자기 세탁소 안으로 쑥 들이닥쳤다. 써니는 한눈에 사태를 파악하고는 나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말했다. 나는 억울했지만 써니의 뒤로 비켜섰다. 써니는 정중하게 녀석의 이름 뒤에 “썰”하고 붙여서 말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런 써니는 “너, 나에게 어떤 말을 해도 용서할 수 있지만, 내 직원에게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야유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사과하라고 했다. 너무나 당황한 녀석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그쳤다. “너도 이 땅에 이민 온 사람 아니냐? 그리고 네 엄마나 할머니 그 이상, 네 집안도 아마 이 땅에 이민을 왔을 때가 있었겠지, 처음부터 너희 가족들이 이 땅에 살았느냐?” 빨리 대답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때를 한 번 생각해 봐라, 처음부터 해보지도 않던 말이 술술 나오더냐? 이제 막 이민을 와서 모든 것이 어렵고 낯설어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네가 도대체 누구냐? 이 사람이 말이 서툴긴 해도 널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내가 아는데, 넌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아주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니 네가 옳으냐? 말 좀 해 보아라!” 너무나도 친절했던 써니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지 노랑콧수염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만약 네가 세탁소를 나가는 순간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기로 결심한다고 해도 나는 아무 상관없다, 너 같이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사람한테는 서비스를 해주고 싶지 않다, 오늘 이후로 오지 않아도 좋지만 넌 반드시 내 직원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계속해서 써니는 노랑콧수염이 변명할 틈새를 주지 않고 연속적으로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노랑콧수염은 혼비백산 옷을 들고 줄행랑을 쳤다. 세탁비를 계산하지도 못한 채였다.

다음날 아침 놀랍게도 노랑콧수염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굿모닝?” 하고 인사했다. 하지만 화가 나서 나를 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는 쥐가 날 것 같았다. 한데 그는 어제 자기가 세탁비를 내지 않고 갔다면서 티켓을 내밀었다. 나는 마음을 다져 먹고 꼼꼼히 센트까지 계산해주고 뒤에 서있는 서너 명 중 누가 순서인지 가릴 새도 없이 “다음 손님 오세요.”라고 최대한 빠르고 침착하게 불렀다. 이빨이 와다닥 부닥치는 소리가 났다. 다른 손님들에게 “좋은 날씨”라고 환하게 웃어주면서 주문을 받았다. 녀석은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뒤로 물러나 손님들이 일을 보고 돌아가기까지 기다렸다, 둘만 남았을 때 나는 어쩔 수없이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느냐 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랑콧수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I’m sorry” 하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를 처음 만난 날 꼭 필요한 옷이 나오질 않아서 매우 화가 났었다고 천천히 내가 알아듣도록 말했다. “그런데 네가 하는 말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더욱 화가 났다”는 것이었다. “네 영어 발음을 이해한다. 허지만 당신도 자신을 위해 빨리 영어를 배워야 이 미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나도 당신에게 소리 지르고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난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서비스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주 공손한 얼굴로 내 말을 듣던 노랑 콧수염은 돌아가 생각해보니 자기가 나에게 말을 함부로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고 난 후 “혹시 너에게 옷 수선을 맡겨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네가 바느질을 아주 잘한다고 했다.” 나는 “물론이요” 했다. 그는 “땡큐”하고 악수를 청했다. 나도 “땡큐”하고 활짝 웃어주었다.

그날 점심을 먹으며 써니에게 노랑콧수염이 아침에 와서 세탁비도 주고 서로 화해하고 웃으며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듣고 써니가 “어 그래, 녀석 제법인데, 쥴리씨도 맘고생 많았는데 다행이네”하며 기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그러게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왔더라고요” 그렇게 대답하며 나도 써니를 향해 크게 웃어주며 눈을 들어 밖을 내다보니 모처럼 나의 젊은 날 가슴을 설레게 했던 꽃, 능소화를 닮은 붉은 덩굴 꽃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히도록 모든 것이 힘겹고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되는 것 없는 이민의 삶이지만,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이 땅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라는 깨달음이 새삼 생겨났다. 척박한 땅이지만 그래도 꿋꿋이 발을 디디고 설 수 있겠다는 각오가 새삼 일었다. 세탁소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정오의 햇살이 어느 날보다 따뜻하고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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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저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갑자기 급물살을 바꿔 탄 곡예와 같았습니다. 이민을 결정하는 순간조차 너무나 당황이 되었고, 차마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다 내몰리는 판이었으니까요. 더는 미련을 갖지 말자는 결심의 표시로 이제까지 사용해오던 장롱을 골목길에 내놓고 쪼개고 부수었습니다. 돌아갈 곳을 두고 있지 않았기에 벼랑 끝에서 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공항에서 헤어질 때 손위 오빠가 “어정쩡 돌아오려거든 아예 떠나지도 말라”고 말했다면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어린 동생의 말을 날마다 입속으로 되뇌었습니다. 이제 이 글을 통해 뒤를 돌아다봅니다. 가본 적 없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저에게 복병이 숨어있겠다고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참 많이 아프고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만남을 통해 우리 이민의 삶은 이어지고 또 반복되는 것이겠지요. 독수리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수많은 도전을 통해 날아본 적 없는 하늘을 비상하는 자유를 누리듯, 이제 저에게 맺혀진 상처들을 말리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난 신문을 펴놓고 발톱을 깎고 있던 남편 발밑에 문예공모 안내문이 제 안을 파고 들어왔습니다. 정말 잊고 있었던 나를 찾고 싶었습니다. 창사 46주년을 맞으신 미주한국일보의 생일잔치 날! 기쁜 소식 감사 합니다. 부족한 제 글을 심사해주신 심사위원께 고개를 숙여 큰절 올립니다. 자만치 않고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함께 발맞추어 걸어준 글마루문학회 문우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묵묵히 믿어주고 제 글들의 첫 독자가 되어준 남편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은혜, 제이슨, 재국, 몰리야, 너희들 실망시키지 않는 엄마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마. 마지막으로 사십을 훌쩍 넘기고 뛰어든 아이와 같은 엉뚱한 이민의 삶을, 응원하시고 때론 업고 어르시며 여기까지 함께하신 나의 하나님께 이 상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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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회 문예공모전 생활수기 심사평] 

심사위원 박경숙 /소설가

올해 생활수기 부문 응모작은 총 32편이었다. 작년에 비해 양도 늘고 내용도 좋은 것이 많았다. 한 편씩 읽어나가며 내용과 구성이 정리된 것을 골라놓고 보니 응모작 절반에 가까운 14편이었다. 그중 다양한 성향의 독자들을 고려해 정치나 종교적 사상에 치우친 글 4편을 제외했다. 나머지 10편중에서 아름다운 글이지만 길이가 짧아 수필에 가까운 ‘나의 특별한 사랑’과 ‘작별’을 빼놓았다. 제외된 또 한편은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이란 특별한 직업의 경험을 쓴 ‘군데리아’였는데, 글쓴이가 지금 어느 시점에서 쓰고 있는지 앞뒤의 연결고리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최종까지 남은 일곱 편은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았다. 이민 수기를 착실히 써내려간 김선주의 ‘옛날 옛적에’와 김평화의 ‘내 가슴의 영원한 무지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심정을 피력한 예창순의 ‘She’s gone’, 한편의 소설처럼 한 여성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 에피소드를 쓴 한광명의 ‘어느 통일교도와의 사랑’도 좋은 글들이었다. 그러나 좀 더 짜임새 있는 글 3편만을 남겨야 했기에 수상권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수상후보작으로 ‘새벽 여명’, ‘행복 찾기’, ‘유 노 굿’이 남게 됐다. 이중에서 이민생활의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엮어간 이선의 ‘유 노 굿’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서투른 영어 때문에 겁을 먹고 긴장하는 장면은 이민자 누구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낯섦을 이겨내고 백인 손님과 오해를 푸는 대목에선 흐뭇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문장이나 구성이 흠잡을 데 없는 글이었다.

가작으로 뽑은 최은희의 ‘행복 찾기’는 이민 수기라기보다는 인생의 수기라 해야 옳을 것이다. 몸이 아픈 아들 곁을 오랜 세월 지키며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인이, 스스로를 위해 산책을 시작하다 결국 히말라야 등반까지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물 흐르듯 써내려간,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장려상엔 마지막 남은 박나리의 ‘새벽 여명’이 정해졌다. 내용을 읽어보면 현재 캐나다에서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분이다. 학창시절 오빠와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대학진학을 포기했는데, 결혼 후에도 시누이들과 심지어 남편까지 대학을 졸업시킨 이야기를 야구와 견주어 재미있게 풀어갔다. 결국 60세의 나이에 자신도 사이버대학에 입학해 문예창작을 전공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빈틈없이 잘 짜여 진 글이었지만, 조금 더 이민적인 것과 삶의 아픔에서 감동을 길어 올리는 글들을 앞세우다 보니 장려상에 머물게 되었다.

순위에 들지는 못했지만 83세 된 할머니가 손으로 적어 내려간 노트 한 권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이 드신 응모자들의 6.25 전쟁 이야기는 아직도 가슴을 울리고 새삼 고국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생활 수기는 인생의 회고록이 아니고, 생활 중의 한 단면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글이 되어야 한다.

인간에겐 진실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슴에 담긴 진실 한 편을 써냄으로써 스스로의 힐링을 경험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수기 부문 응모자들에게도 그런 치유가 일어났을 것을 믿으며, 심사위원의 가슴에 응모자들의 온갖 사연이 귀하게 고여 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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