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훈씨 증언

50년전 경제부흥의 초심’에서 배운다 -
박정희 통역관
한국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된 서독 상업차관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백영훈 원장
.
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앞세워 집권한 박정희는
‘하면 된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경제’는 의욕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집권하며 내걸었던 공약대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문전 박대당한다.
미국 측에서 보기에, 준비해 들고 간 사업계획서들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당시 케네디 정부는 5·16군사정변 자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조짐이 일고 있었다. 

미국 금융기관들도 야박하게 퇴짜를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무상 원조를 주고 있는 나라에 차관까지 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미국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지만
‘국교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나라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서독이었다.
서독 경제는 1950년부터
매년 연평균 8%대의 실질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서독의 모습을 보며
박정희는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보자’라는
각오를 갖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주독(駐獨) 대사관에도, 사절단에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 유학생으로
서독(뉘른베르크 에를랑겐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독일 경제학 박사 1호
백영훈 씨(83·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가
안테나에 걸렸다.
그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 원장은 사절단의 공식 통역관으로 합류한다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하긴 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처지는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 최빈국 같은 나라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 사절단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

당시 서독의 경제장관은
2년 뒤 총리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에르하르트 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다.

“한국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관을 만나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지만
은사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결국
매일 아침 6시 교수 댁 앞으로 가서
사모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눈물로 호소했다.
‘사모님, 저를 살려 주세요. 장관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다.

1961년 12월 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과 만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마침내
1억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사절단은 귀국하고 백 원장은
뒷마무리를 위해 독일에 남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국가 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시 백 원장의 말이다.
“못사는 나라 국민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매일 울면서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돈 꾸러 왔는데
지급보증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 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독일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소식을 들었는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슈미트가 찾아왔다.
그는 당시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슈미트 과장은 대뜸 백 원장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실업자가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백 원장은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슈미트 과장은 다음 날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000명가량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백 원장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 대사는 백 원장의 말을 듣더니
“5000명이 아니라 5만 명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했다.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신 대사는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공고가 난다. 

당시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다.
비행기 자체를 타기도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고임금을 받고
서독 같은 선진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다.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6 대 1의 경쟁률이었다.
선발 자격을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도시에 사는 경험 없는 대학 졸업자들도 무조건 신청했다.
탄광 갱도조차 구경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했다.
1963년 9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여 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
없는 고등실업자임이 밝혀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
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가짜 광산취업증명서를 사서
제출했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 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
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유령 광산에 대한 조사를 할 계획이다.’

실제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 졸업자였다.
서독 루르 지방으로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다. 
다들 관심이 높았던 사안이었던지라 노동부는 1차 모집에 합격한 응시자들을
마치 고시합격자 발표하듯 각 신문에 명단을 실을 정도였다. 

드디어 1963년 12월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진 123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북부 함보른 탄광과 뒤셀도르프 서쪽 아헨 지역에 있는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
파독 광부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다. 

이들의 수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방크를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
이 코메르츠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진 것이다
.
우여곡절 끝에 차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백 원장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국한 뒤 다시 중앙대 교수로 복직한다.

3년이 흐른 1964년 말,
백 원장은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그 전해인 1963년 10월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3공화국 대통령이 된 터였다.

박 대통령은 백 원장을 현관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번만 더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서독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했는데
통역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 라인강 기적 설계자
“고속道 깔고 車-제철-정유 육성”
조언 ▼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거였다.

“당초 5만 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
갑자기 취소해 버리고 만 거였다.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다.”

백 원장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다.
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서독 정부에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일제강점기 때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제3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에게
부탁하여 함께 서독으로 날아갔다.
최 전 사장은 독일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백 원장 일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
뤼브케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노동부 차관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비행기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용기를 내 운을 뗐다.
“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독일 관료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떠나기 직전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1964년 12월 3일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여객기(보잉 707)가 경로를 변경해 서울에 착륙했다.
박 대통령이 그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갔다.”

대통령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타는 상용 노선에 취항 중이던
비행기에 급히 타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해외 경험이 없었는지는
비행기에 동행했던 조선일보 정치부 이자헌 기자의 회고
(‘파독 광부 45년사’)에 잘 나와 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1등석에 타고 다른 일행은 이코노미석에 탔다.
화장실에 가 보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용도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때 여기자로 유일하게 수행기자로 포함됐던 
한국일보 정광모 기자가
‘물비누’라고 설명해 줘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기자들도 국제적 촌놈이었고
대통령 일행도 참 초라한 행차였다.
기내의 박 대통령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 자격으로 초청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 말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서독의 광부들 때문이었다.
백 원장의 설명이다. 
“연일 서독 신문과 방송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국 광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하 갱도 1000m에서도 시간외 근무를 마다않고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TV에 방영되자
서독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을 초청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28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1964년 12월 5일
대통령과 총리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
백 원장은 그날
에르하르트 총리가 열어 준 만찬 자리에서 보여 준
박 대통령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당시 마흔일곱이던 박 대통령은
서독 총리를 앞에 놓고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국민 전부가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박 대통령 말을 통역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왜 쿠데타를 했느냐?”라고 묻는 총리의 질문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우선 잘살아야 한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
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
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 
“박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총리가 대통령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열정과 사명감에 감화된 듯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을 위한 조언을 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며 총리의 말이 이어졌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실제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낸다.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은인과 같은 존재다.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독 2대 총리(1963∼66년)로 재임하고 있던 그는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독일인들에게 ‘모두를 위한 번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독일 경제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
‘우리는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은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2억5000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다음 날은 박 대통령이 독일의 한 공과대에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독일 사람은 교수가 강의하러 들어오면 박수 대신
주먹으로 책상을 수차례 가볍게 두드리는데
사전에
이 이야기를 미처 대통령께 전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가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야유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통역관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 양반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했는지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학생들이
또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이
‘아. 무시가 아니라
경청의 의미구나’ 하고 눈치 채고는
안심하고 원고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웃음).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박 대통령이 내게
‘이 사람아, 왜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
창피당할 뻔했다’고 농담조로 핀잔??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한국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날 학생들에게 했던 연설도
“우리도 여러분이 이룬 라인 강의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는 거였다.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광부들의 얼굴엔 온통 석탄이
묻어 있었고 작업복 역시 흙투성이였다.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랐다.
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
500여 명의 광부 등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연주가 끝나자
박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예 원고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광부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 창문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했다.

서독에서 머문 일주일(7∼14일) 동안
박 대통령은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을 달렸고
제철소를 견학했다.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
나치 정권하에서 총연장 1만4000km를 목표로 건설하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3860km를 완성시켰던 ‘아우토반’은
박 대통령이 방독할 무렵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로유명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의 건설과 관리 방법, 
소요 비용과건설 기간, 건설 장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결국 3년 뒤인 1967년 11월 7일 청와대 회의에서 건설부 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하며 직접 진두지휘까지 하기에 이른다. 

백 원장은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 박정희’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경험이
나의 평생 삶을 이끌어 준 나침반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박 대통령을 보며 그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중간쯤 자동차를 전부 세우더니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육 여사도 서독 방문 내내 눈물을 훔쳤다.
남편 때문에 울고 광부와 간호사 때문에 울고.”

백 원장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기억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박 대통령 혼자가 아니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목숨 내놓고 일한 광부와 간호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경제 발전도 없었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한국인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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