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奬三藏(현장삼장)에 관하여,

2024.07.09 12:50

김일하 조회 수:23

3. 玄奬三藏은 누구인가?

  "唯識三十頌"의 번역자는 中國의 玄奬三藏 이다. 탄생은 600년 도는 602년의 두 설이 있다. 망일(亡日)은, 麟德元年(인덕원년,664) 二月五日(玄奬忌,현장기) 이다. 日本과 우리나라에서는  三藏法師(삼장법사)라고 하는 편이 더 잘 통 한다. "西遊記(서유기)"의 주인공, 三藏法師라고 하는 것은 玄奬三藏을 모델로 한 것인데, 玄奬三藏은 역사적 인물 이다. 玄奬三藏은 7세기의 사람, "西遊記"는 16세기 明代(명대)의 작품. 7세기라고 하면 中國에 佛敎가 전래 된지 600년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이미 번역되어 있는 전적(典籍)이 꾀 많았고, 三藏도 그것으로 해서, 㫿識을 배웠던 것이다. 말하자면 구역(舊譯)의 唯識이 였다. 이것을 읽으며 그는 많은 의문이 생겼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唯識佛敎의 원점이라고 는 "喩伽師地論(유가사지론, 喩伽論)을 배워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느겼다. 그러러면, 발생 고장인 인도에 가야 하겠다고 하는 생각이  三藏을 몰아 부쳤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唐(당나라)이 천하를 통일한 직후였기 때문에, 국내의 안정을 위하여 정부는 엄중한 쇄국정책을 하고 있었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인도에 갈 수가 없었다. 향학심에 불타는 三藏은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渡天(도천)의 허가를 몇번이고 원(願) 했으나 결국 허가를 받지 못하고 드디어, 밀입국을 결행하게 된다. 이것이 언제였던가는 자세히 알 수 없는것이 분 하지만, 아마, 20대 후반이라는 때 였을 것이다. 대체로, 20대 후반이라고 하는 때는, 사람이 의욕의 절정에 불타, 자신이 넘쳐나는 년령 이다. 귀국은 貞觀十九年 (정관19년, 645), 그러니까, 왕복 합하여 17, 8년에 이르는 장기간의 인도행이 었다. 唯識이라면, 당시의 인도의 佛敎 중심지 "라미난다"였고, 戒賢論師(계현론사, 사~라 파도라, 529~645)에게서 5년간 수학 했다. 수학했던것은, 護法菩薩系(호법보살계)의 唯識佛敎 였다. 護法菩薩系의 唯識佛敎라고 하는것은, 世親菩薩이 만든 "唯識三十頌" 에 대한, 몇 가지의 해석이 있는 가운데 하나의 학파 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자기 즉, 비약함이 없는 착실히 진실(참뜻)을 구하는 종교성이 풍부한 唯識佛敎 였다. 원래 佛敎라고 하는것은, 어떤 게열이곤 간에 자기탐구를 근본으로 하는 것인데, 이 가운데서도 唯識은 그러한 성 격이 강한 佛敎였고, 그런 唯識중에서도 護法菩薩系統(호법보살계통)은 그것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또 정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佛敎를 어떤 각도에서 보게되면, "有 = 존재성(存在性)"을 중시하는 流派(유파) 와, " 無 = 存在의 空無性(공무성)"을 강조하는 流派의 두 흐름이있다. 무론, 별개의 것은 아니고, "有"라고 해도 "有 = 無"의 "有"이고, "無"라고 해도 "無 = 有"의  "無" 임으로, 이러한 범주속에서 볼 때, 護法菩薩계통의 唯識은 전 佛敎중에서 가장 "有"에 성격이 강한 佛敎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有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는 것을 갖이고 정도가 얕은 (踐한)것이라 생각하는 愚說(우설)도 있는데, "有"를 떠나서 에디에 진실이 있다는 것일까. 현재 여기에 실존하고 있는 자기를 비켜가서(通過해서), 어디에 인생(삶)의 근본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일까. 이 계통의 唯識이 三藏에 의해 전 해 졌고,그것이 그대로 日本에 전해 져서, 그 뒤 긴 세월 中國 과 日本의 唯識佛敎의 주류가 되었다. 

三藏의 往還(왕환)의 길은, 현재 Bus 나 열차로 왕래하는것만으로도 압도되는것 같은 장절한 대 자연이다. 莫賀延碩(막가연석)이라고 불리우는 황야, 한번갔으면 두번에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다구라마칸"사막, 굳혀진 흙으로 대지에 두드려 박은듯한 천산난맥(天山山脈), 가리코름, 힌도우구시, 히말라야 등등 같은 천고의 눈 덮인 산, 산 과 물 한방울의 소리 울려 퍼지지 않는 사막과 황야 이다. 작가 太田久紀(Ohda kyuki)씨는, 수년전 그 일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면서, 그 무서웠던 광경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 였다고 했다. 영달  때문도, 무슨 큰 이익을 얻는것도 아닌데, 오로지, 佛道의 진실을 구하려는 일념에서의 신고(辛苦) 였다고 하면서 , 그 순수한 인도행에 그저 그저 머리가 숙여질 뿐이라고 했다. 묵묵히 三藏의 芳躅(방촉)에 경모 할 뿐이라고 했다. 이 여행에서 몇번이나, 나는 사진(沙塵)이 춤을 추는 사막에서 天竺(천축)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三藏의 뒷 그림자에 경배 했다. 기억하기로는, 그것은 아마도 나의 환영(幻影)이 었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이 맞는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환영의 三藏의 뒷태에 몇번이고 몇번이고 합장 예배할 수 밖에 없었다. 

Silk road라고하면, 거기서는 여기 저기 왕궁, 성새, 시가와 사원의 흔적을 보게 된다. 전부가 페허 이다. 옛날 그 화려했던 영화는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이세상의 事象(사상)의 숙명을 말하여 주는듯 했다. 정말 "諸行無常(제행무상)의 울려 옴"이 었다. "盛者必哀(성자필애)의 이치" 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 거기를 통해서 전해진 佛道에 지금 만나고 있다. 한 사람 중(僧)에 의하여 운반되어 온 하나의 문화는, 천수백년 경과 한 오늘도, 역사의 성쇄를 넘어서 현재에 살아 움직이며 우리에게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문화라는 무게를 통감하게 한다.  돌아 올 때는 밀입국의 三藏이었음에도, 귀국은 개선장군과 같은 환영을 받았다. 

唐의 太宗, 高宗 二代 황제의 尊崇을 받았다. 이후 18년간, 三藏은 황제의 외호를 받으며, 오로지 전래의 典籍의 번역에 대부분을 받쳤다. 舊譯唯識이 대표적 번역자  眞諦三藏(499~569)의 전전 장소를 바꾸어 가며 유리속에서 번역했을 때와 비교하면, 옹호자에게 수호되어진 행복한 번역사업이었다. 그저, 한번 도중에, 崇山(숭산)에 은퇴하여 禪行(선행) 수행을 하고 싶다는 뜻을 황제에게 원을 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三藏 자신의 가슴속에는 佛者로서의 마음에 남길것이 어느정도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역자라는 일면에만 국한 해 본다면, 많은 혜택을 받은 경우라 하겠다. 공적인 佛典의 번역이라고 하는것은, 한 사람이 서재에 앉아서 차근차근 쉬지 않고 작업을 진행하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宋 高僧傳(송 고승전)"卷二 "佛祖統記(불조통기)" 권 四十三같은데, 九位(구위)의 역활분담의 기록되어 있는것 같이, 여러 분담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하게 된다.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譯主(정면에 좌정하고, 梵문(범문)을 述(술)하는 중심인물,)

2. 證義(좌측에 좌정하여 梵文을 비판 검토하는 자)

3. 證文(역주 우측에 좌정하고 梵文에 오(誤)자가 없는가를 교정하는 역) 

4. 書寫(梵音(범음)을 그냥 그대로 한자로 표기하는 역)

5. 筆受(번역을 문장화하는 句를 만드는 역)

6. 綴文(문자를 綴(꿰맬 철)하여 句를 만드는 역)

7. 參役(梵文과 漢文을 비교하여 틀림을 교정 하는 역)

8. 刊定(긴문장을 짧게 만들어 句의 의미를 정하는 역)

9. 潤文(나면하여 문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역)

황제의 외호로 이루어 지는 번역사업을 "奉詔譯(봉조역)"이라고 하며, 玄奬三藏의 번역은"奉詔譯'었기 때문에, 이것을 위에서 말 했던것과 같은 대대적인 분담역활이 배치 된데서 조직적으로 정확공정하고 권위있게 작업이 진 행 되어야 한다. (深浦正文, 唯識學연구 ,上. "불교학사전 참조).

번역이라고하는 것에는, 자기멸각(自己滅却)이라고 하는 정신적 자세가 전제 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 크게든, 적게든 자기 현시욕(顯示欲)을 가지고 있다. 자기를 돋보이려고 하는,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하는 "마음"이 어디엔가 숨어 있다. 그럼에도 번역이라고 하는작업에는 그것이 개입 되어서는 안 된다. 無私(무사)가 되어야만 한다. 자기를 내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세워야 하는 것은 원전(原典)이다. 원전의 의미와 그 느껴지는 맛이어야 한다.  三藏은 唯識佛敎에 관하여 의문을 품고 인도에 갔기 때문에, 스스로 귀국을 결심 했을 때는, 이것만이 본래의 唯識佛敎 라고하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 현시욕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귀국후, 제일 먼저 했었던 일은, 그 자신으 이해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번역이 아니고, 三藏 자신의 문장으로 쓰여진 저작이 있었드라면,  三藏의 唯識佛敎를 아는데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 읽으면 된다. 그런데, 三藏은 그 자신의 문장으로 썻던 것은 "大唐西遊記"十二卷의 일부뿐이었다. "大唐西遊記"는 17~8년이 걸친 인도행의 기록 이다. 이 정세하고 정확한 여행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여행기의 하나로 높이 평가" 되어 있지만, 三藏의 佛敎 그것을 듣는데는 최적의 저작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 의하면, 三藏은 인도에서 몇칠이 걸려서도 많은 학승들을 상대로 佛敎의 정의를(正義)술회 하였는데도 거기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이의를 제창하는 자는 한사람도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결코 어학이 아주 능수 능통한 정도는 아니었는데도 내면에서 끓어 오르는 불법의 정의를 비장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표현을 철저적으로 누르고 번역에 헌신, 여한 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 었을까 생각 해 본다. 번역이란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佛敎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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