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太田久紀(Ohda Kyuki),

2024.07.20 10:50

김일하 조회 수:19

成唯識論, 太田久紀 著,

제 1 장. 佛敎의 인간학

만담가(落語家)와 동학초(同學鈔), 藤本義一 著, "鬼의 詩(도깨비의 노래)라는 책 속에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1. "馬喬(마교)에게 잘 어울리는 佛典(불전)".

  당시, 예인(藝人)들은, 무학, 문맹을 간판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이라고 하는 읽을거리로는, 기껏해야 江戶時代(Edo 시대)에 누런종이에 등사한 주간지라든가, 재담본의 등사판 정도 였는데, 馬喬는, 이런것에 개의치 않고 , 오로지 불교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것들은 거이 전문가들이 강론하는 서적들이 었다. 漢譯 "成唯識論"이라고 하는 길고 까다로운(煩瑣'번쇄') 책에 매 달려 있었다. 俱舍唯識(구사유식) 이라고 하면, 불전의 원전이다. "成唯識論"을 읽기 위해서는, 보통은 慈恩大師의 "述記" 二十권, 智周(지주)의 "演秘,연비" 十四권, 여기에 덧 붖쳐 解脫上人(해탈상인)의 "同學耖" 五十권 이라고하는 막대한 책으로 기초를 쌓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종교가들 사이에서도 이것들을 해독하는데는 일생의 세월을 소비해야만 했다. 馬喬같은 만담가로서는 엄두도 못 내는 이러한 책들을, 그것도 唐代의 漢文으로 읽어 나가고 있었다. 그의 장적(藏籍)의 집에서는, 漢書에서 풍겨 나오는 만권의 화지(和紙)의 습한 내음이 진동하고 있었다. " 馬 양반, 말로 밥 벌어 먹는 사람이 뭔데 이런 책들을 읽어야 합네까" 라고 친구들이 물으면, "말로 밥 벌어 먹는 사람으로 읽는것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읽는 것이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서, 그러다가 죽는것 아이가, 그 짧은 삶동안, 마음의 양식을 자기것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조곰도 물러서지 않았다. "鬼의詩 도깨비으 노래'"는 藤本(Fujimoto)씨의 直木상 수상작품으로서, 明治 말년,  大阪(Osaka)에서 활약하던 桂馬喬(계마교)의 奇矯(기교)한 생애를 그린 소설 이다. 여기에 나오는 것들중에, "成唯識論"이라든가 "述記" "演秘" "同學鈔"라고 하는 책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작품속에 佛敎가 다루어 지고 있는 경우는 ,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佛敎가 현대 日本에서 어느정도의 위치에 있는가를 가늠하는 흥미로운 일이 지만, 이것은, 어느정도의 준비가 잇은 후뒤에야 하는것임으로 여기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어쨋던 그저 佛敎 서적의 이름이 열기 되어 있는것에만 주목 해 주십사 한다. 그리고 여기에 열기되어 있는 책들이 唯識學의 본격적인 책뿐이라는데 주목 해 주시기 바란다. 이 중에서도, "同學鈔"라는 책은, 지나치게 전문적인 것으로, 전문가들 속에서도 전권을 읽은 사람은 드믈정도로 번쇄(煩瑣)한 책이라는 것이다. 문학자품에 佛敎典籍이 등장한다는 자체가 진귀한 것이지만, "唯識學"과 같은 책이 등장한다고 하는것은 , 아주 드믄 일이다. 唯識의 일이 대대적으로 취급된 근년의 작품이라고 하면, 三島由紀夫(Mijima Yukio)의 "풍요로운 바다" 4부작이 유명하다. "豊饒no 海"와 같이, 唯識學의 사상의 중심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해도, 그러나, 佛敎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그 이름마저 접촉 할 수 없는 책들의 책명을 들추었다고 하는것만 가지고도 강력한 흥미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해 본다. 주인공 桂馬喬의 일생은, 확실히 奇矯(기교)라는 말에 걸 맞는것 같다. 藝를 구하려고 방황하는 생애는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니다. "귀기(鬼氣)에 쫒기어"라는 말이 꼭 들어 맞는것 같이 처절한 일생 이다. 馬喬가 실제로 "成唯識論""述記""演秘""同學鈔" 같은 것들을 읽었는가, 아니면 작가인 藤本씨가, 작품구성상 선택한것인가는 확실히 알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馬喬의 생애를 장식하는데에는 최고의 부식이(不識己)한  佛典을 취하고 있었던것은 아닌가 해 본다. 馬敎가 읽은 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든가, "觀音經(관음경)", "淨土三部經(정토삼부경)"과 "碧巖錄(벽암록)"등이었다면, 비범한 馬喬 가 평범히 되어 버렸을것이라 사료 된다. 그런 일반적인 서적이 아니었기에 馬喬의 고독한 생애가 한층 더 깊은 맛을 보여준게 아닌가 한다. 그것은, 唯識이라고하는 佛敎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분위기가 묻어 나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라고 하는것은, 唯識이 인간의 개(個)의 일면을 적출 해 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번잡한데가 다소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통하게 되는 특수한 佛敎라고 생각되는 면이 있다는것을 의미 한다. 역사적으로도 日本에서는, 인간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면서 一乘佛敎(일승불교)속에서도, 단지 혼자서, 인간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三乘佛敎(삼승불교)의 주장을 고수 해 왔다고 하는, 조곰은 비장감이 동정되는 면도 있다. 그런점이, 무엇인가, 馬喬의 생애에 잘 어울리는(相應)것이라 생각 된다. 그러나, 唯識學은 그런면만 있는것이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부터 이야기 하게되는 佛敎의 인간학 이라고 하는 일면이다. 奇席藝人 馬喬에 있어서도 이러한 일면이 그것과 상응하게 되는것의 하나라고 생각 된다.

2. 현실의 자기를 응시 하라. 

  佛敎의 인간학인 "唯識學"은, 결코, 말, 행동, 성질 등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佛敎라든가, 학자들만을 위한 佛敎는 아니다. 佛敎에 입문하는데 가장쉽게 이해시켜 주는 佛敎中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 하는가 하면, 唯識學은 언어와 도리를 모두 동원하여 끝까지 佛敎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믿게(信)하기 보다는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것을 그렇게 좋와하지 않고, 왜? 라고 그 이유를 되 묻는다. 그러한 지적인 요구에 응답 해 주는것이 "唯識"이라고 해도 무방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하나는, 佛敎라든가, 극락세계라든가 하는 종교적 피안(被岸)의 경지의 것들을, 불쑥 정면에 내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大西良慶 和上은 법화시(法話時,) 唯識에는 "고맙습니다. 부처님!" 하는 말은 없다고 한다. 요 대목만 끊어서 듣는다면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말이 되겠는데, 종교라고 하는것은, 그저(함부로, 멋대로)고맙다 라든가, 어떤 이익을 매물(買物)로 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하여 唯識이라고 하는데서는, 그러한 면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唯識은, 고맙다 고 하지 않는데서 출발 한다. 고맙다고 하지 않는데서 라는 것은, 이 현실의 자기를 말 한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이 자기, 저것이 가지고 싶다. 아~ 그렇게 되고 싶다. 저렇게 되고 싶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자기, 이런 현실의 자기를 "가만히 응시 하라" 唯識은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고로, 唯識이 먼저 취하게 되는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보통사람인 우리들이다. 극락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이 세계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현실에서 자기만큼 몸 가까이에 있는것은 없다. 그리고 그만큼 확실한 존재로서 받아 드려지는 것도 없다. 이런 현실의 자기, 지금 여기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자기, 그 자기가 자기를 자각 한다. 그 자각하는 자기를, 먼저 자기로서 자각하는 본래의(根低의) 자기, 이와같은 자각의 전체의 노동(働)을 唯識에서는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Swis의 정신분석학자 융(Jung)(1875~1961)은 자신의 정신의학에의 출발을 " 내가 체험하는 것들은 모두가 나의 심적현상 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영원한 사실위에 나의 기초를 구축 하기 위하여, 나는 나라고 하는 주관적 존재라는, 최상의 독자(獨者)로서 내면의 기초를 알아차리고 이것을 인식 하려고 한다" 라고 하면서 술회하고 있는데, 어쩐지唯識學의 출발과 잘 닮아 있지 않나 경탄 해 마지 않는다. 鎌倉時代(kamakura시대'일본') 의 良遍(1194~1252)이라는 唯識의 고승은, 대표적인 저작 "觀心覺夢鈔"의 머릿말에, 먼저, "마땅히 자기 마음을 알아야 한다" 라고 쓰고 있다 "마음"의 탐구를 말 하는 것이다. 시대와 동서는 다르더라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唯識이라고 하는 佛敎는 옛과 오늘에 실제로 잘 알려진 佛敎라는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唯識처럼 몸에 와 닿는 佛敎는 없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말을 바꾸어 하면, 唯識學이라고 하는것은 佛敎의 인간학이라고 해도 된다는 것이다."말쟁이가 말 하기위해서 읽는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다"는 민담가 馬喬이 말은 唯識의 핵심에서 볼 때, 틀린 말은 아니라는 一句가 되겠다. 인간학이라고 한것은 唯識에 한한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 할 나위도 없다. "스스를 灯(열화 정)이라고 하며 귀의처(歸依處)로 만들자"라는 불타(佛陀)의 생각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전 佛敎를 일관하는 정신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인간의 내면에 스며들어(沈潛), 현실 존재의 깊숙이에 들어있는 道를 일념(一念)으로 끝까지 규명(窺明盡)하려고 하면서, 인간을 버리면서, 또 인간을 초월하려고 하는 佛敎가 唯識이라고 해서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馬喬가 읽었다고하는 "成唯識論"은, 인도의 "다르마 파라"(530~561), 中國과 日本에서는 護法菩薩(호법보살)이라고 불리우는 학승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 唯識佛敎의 개론서인 것이다. 그 번역에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는데, 中國의 玄奬三藏(602?~664)에 의하여 漢文으로 번역 되었다. 述記는 玄奬의 제자 慈恩大師 基(기)(632~682)가 "成唯識論"에 붖친 주석이다. "演秘"는 慈恩大師이 孫제자 智周(지주668~723?) 가 "述記"를 보충한 것이고 "同學鈔"는 日本의 解脫上人 貞慶(1155~1213)의 문제자(門第子)들이 平安朝에서 鎌倉시대에 걸쳐서 있었던 학승들의 의론(議論)의 초고(草稿)를 뫃은것으로서, 日本 唯識의 최고의 유산이라 해도 되겠다. 한마디로 말 해서 馬喬는 인도, 中國, 日本의 唯識의 대표적인 서적을 그의 곁에 놓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전부 읽었다고 했다면 대단한 사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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