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단련(Training of mind)

2024.07.28 10:04

김일하 조회 수:19

3. 마음의 단련(Training of Mind),

  "成唯識論"의 속 뜻은사람의 "마음" 이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 즐겁다고, 슬프다고, 미워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 "마음"을 응시, 성찰 하면서, 空相(공상)인 자기를 각성하여, 희노애환(喜怒哀歡)의 자기를 가만히 음미하며 살아 가고 있다. 이런 음미하는"마음"이 佛敎라고 해도 되겠다. 唯識에는, 훈론(訓論, Seminer, Free Pannel discussion 같은 자유 토론 형식)하는데서 얻은, 치밀한 사색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학적인 방법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 해져 왔다는것도 사실 이다. 그런데 "마음"이란것은 닌해(難解)한 책속에 있는것이 아니고, 行住座臥(행주좌와)라는 생활속에 살아 움직이고(活動) 있는것으로 그곳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들이 본다든가, 듣고, 생각한다든가 하는 당면의 행동이 "마음" 자체라고 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 하지만, 그 본다는"마음", 듣는다는"마음", 생각한다는"마음"의 구조, 하는 일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따라서 "마음"을 한없이 풍요롭게 해 가는가, 아니면 외곡된(삐뚜러진) "마음"이 되는가 하는 다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음"이 어떠한 구조, 그 하는 일이 어덯게 되어 있는가를 알수만 있다면, 時露(시로, 안개같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것 같은 수시로 변하는) 같은 "마음"을 때로는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게 될 것이고, 와중(渦中,소용돌이속에)에 꼬여있는 자기를 여유를 가지고 바라 보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질투에 광분하면서도 " 이 바보야, 어째서 그렇게 광분 하냐" 하며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혜가 자신에게 있다고만 한다면, 단 한번밖에 없는 자기 인생을 무의미하게 보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마음"은, 내 몸 제일 가까이에 있다. 알려고만 하면 언제던지 즉시로 남김없이 알게 될 수 있다. 이건 사실 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것일까? 아니다. 그랗지 않다. 의외로 스스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어렵다. 만약 그렇지않다면, Stress라고 하는 현대병 하나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Stress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어덯게든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괴로워 하고 있게 되는 것은 왜 인가, 스스로 모르는것은 너무나도 많다. 그런것을 알게 된것은 자신이고, 알려고 노려하는것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혼자서 괴로워 하는 것이다. 이유를 알게되면, 자기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되고, 천천히 그 괴로움으로 부터 벗어 날 수 있게 된다. "마음"의 구조와 그 하는 일을 알았을 때는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 확실하 게 집고 넘어가려고하는 "마음"이 내몸 가까이에 있다고는 하나, 또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만약 거기에 조곰이라도 광기(狂氣)가 미치면, 그것을 바로 잡는데는, seminer와 자유 토론을 통하여 진지하고 의연하게 알려고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때로 나는, 唯識은 정말 난해하다고 소리칠때가 있다. 히말라야 "아이가" 북벽과 같다고 소리 친다.  무언가 알기 쉽게,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것일까. 남을 편안하게 하지 않는것은 불친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부디쳣을때, 그렇게 소리지르고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唯識이 어려운것이 아니다. 佛陀의 가르침이 엄하고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라는것이 엄하고, 지독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傳敎大師(전교대사)가 스스로 " 愚中(어리석을우 중)에 極愚(극우),,,,,,,低下(낮을저, 아래하)의 最澄(맑을징)" 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親鸞聖人(친란성인)은, 愚禿(바보우, 대머리독)이라고 불리워지게 되는데는, 현실의 자신을 안이하게 허용하고, 긍정하며 단정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차원이 다르다. 보통 바보(凡愚)가 그렇게 간단하게 어질고 지혜로운자(賢者)가 될 리(理)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凡愚로서 좋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고 가볍게 여기면서 우쭐대서는 안 된다. 분발한다는 기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걸을때 까지, 몇번이고 몇번이고 넘이지고, 또 일어나면서 실패를 거듭하며 스스로 걸었다. 우리 누구도 다 그렇게 했던것과 같이, 인생이란 十中八九는 끝까지 그렇게 되는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을 잊어 버리고 스스로 서려고 하지 않게 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의 트러불을 스스로 반복하면서 해결하여야 할 문제를 망각하게 된다. 환경에 패배하고 마는것은 자기정신의  역부족(力不足)이라는 것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된다. 물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하는 경우도 있겠다. 그럼에도 그것을 스스로 자기 정신력으로 고난을 국복하려고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우리들의 인생이란것은, 스스로 서서, 스스로 걸어 간다고 하는 마음 가짐이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자립하여야 한다는 힘이 주어져 있다. 자립, 자립하며 노력만 한다면 그 힘으 점점 강해질 수 밖에 없다. 맑게 개인 날, 나는 가금 공원을 가로 질러 직장으로 출근 한다. 東京  Olympic 떄 조선된 이 공원도, 근래에는 수목도 크게 번식(繁植)되어, 제법 시원스럽고 상쾌 하다. 거기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개를 끌고 산보하는 사람, 운동복을 입고 Maraton을 하고 있는 사람, 벽을 상대로 Tennis 연습에 여념이 없는 사람, 부부같이 Jogging 을 즐기는 사람 모두가 신체를 단련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마음"도 그와같이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신체와 마찬가지로 튼튼하게, 신체와같이 유연하게 해야 한다.

 

相田(Aita) 미쓰오 씨의 "興國寺佛頭(흥국사불두)"를 노래한 노래 있다.

 

멀고먼 하늘 저편에

조용히 눈을 감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저 얼굴

이 세상 모든 괴로움에도

이 세상 모든 슬픔에도

그저 가만히 견뎌 내고있는 이 얼굴

깊고 깊은 근심 가득 담은 이 얼굴

이 얼굴,,,,,,

 

인생 안쪽 깊은 곳으로 부터 불어오는

칼날같은 고집스런 냉냉한 바람에도

인간의 無明이 일어나도

가지가지 증오의 칼바람에도

조곰도 비틀거리지 않고

담담하게 견뎌 내고 있는 이 얼굴

그러면서

모든 이들의 괴로움과 근심을

도와주는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사람들은 모른다

끝 없이 한 맺친 얼굴 가슴에 묻고

하늘 끝 한점을 쭉 바라보고만 있는

의연한 이 얼굴

 

이 얼굴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 조용 해 진다

이 얼굴 보고 있노라면 나의 마음 맑아져

이 얼굴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

깊게 조용하게 편안 해 

그저 이 얼굴

보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들도 이렇게 상대에게 의연하게, 담담하게 살아가는 "마음"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려고 하여야 할 것이다.

https://youtu.be/OWT9S7KaB0g?si=u5S5JSJ9EBtleijn

 

X
Login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