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現行熏種子 그 2.

   日本의 정신분석의(精神分析醫) 吉澤平作(1897~1968, Yoshizawa Heizo)은 1932년에 정신분석학의 원조 Floid 박사를 방문하여 "阿者世(Ahshiase) complex" 라는 논문을 제출 했다. 그 논문의 골자는, 日本人의 심층(深層)에 가지고 있는 모성원리(母性原理)의 글이 었다. Floid 가 만들어 낸 Europe 의 정신적 기반은, 시비선악(是非善惡)의 구별이 정확하게 되어 있어서 단언적(斷言的)이었고, 자타적아(自他敵我)가 명확한 부성원리(父性原理)를 심층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에 반하여 日本人들의 深層(마음밑바닥)에는 상대와의 일체감이라든가 선악을 상대적으로 촉구한다던가, 상대편에 대한 배려, 응석을 받아주는 모성원리가 흐르고 있다. 日本人의 경우, 표층심리(表層心理)에서는, 어느정도의

Europe의 근대적 사고가 몸에 익숙 해 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심층의식에서는 최종적으로는 모성원리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 한은, 日本人의 진정한 정신생활을 추구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小此木啓吾(Ohkonoki Keio"日本人의 阿者世 Complex"). 인간의 진실은 빌린 물건이나 수입품을 가지고는 확실하게 포착할 수 없다고 하는것이 되겠다. 竹山道雄(Takeyama Michio) "유럽 여행"이란 책에, 한 France 가정에서의 재미있는 체험이 쓰여져 있다. 식사때, 목이 잘린 숫닭의 머리가 있는 모양 그대로 올라 오고, 검푸르게 된 껍때기에, 눈코가 그대로 있는 犢(송아지 독)의 얼굴가죽이 나오고, 피 묻은 되지머리가 상에 오르기도 한다. 竹山씨는 그렇게 좋은 기분일 수는 없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France 사람들이 日本사람들이 쫴꼬만 새를 통채로 먹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잔혹 하다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 묻은 되지 머리를 Forke로 찔러가며 먹는것과 쫴꼬만 새를 통채로 먹는것과 어느쪽이 더 잔혹한가를 판가름하기란 쉽지가 않다.불살생(不殺生)이라는 눈으로 볼 때는 거기서 거기겠지만,,,,.

무엇에 잔혹함을 느끼게 되는가 하는 다른점에는, 역사의 긴 흐름속에 의해  배가되어 가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 풍토와 식생활과 사회구조의 상위(相違) 같은 것들의 많은 조건들이 작용하게 됨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일 게다. 그것들이 종합적으로 阿賴耶識속에 축적되어 민족성의 다름을 낳게 되고, 이것이 사람의 다름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좀더 거슬러 올라면,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저(根底), 즉 근본(根本)에는

30억년이라는 생명의 역사와 직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는 것이다. 阿賴耶識이 "集積(집적)"의 마음 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밑바닥에 긴세월 깊숙히 과거가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과거를 원인으로 한, 결과로서의 阿賴耶識이라고하는 의미에서 阿賴耶識의 "果相(과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잔영(殘影)을 "種子(종자)"라고 부른다. 阿賴耶識이라는 토양속에 파종되어 있는 종자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種子가 흙속에 뭍혀있는 동안에는, 무엇이 매장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태양과 물에 緣(인연연)이 觸(다을촉)되어 싹을 티운다. 적어도 이런것과 닮아 있는데서 "種子"라고 불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질투라고 하는 보잘것 없는 "마음"은 보통때는 잘 작동하지 않지만, 가끔 "라이발"이 나타나게 되면 홀연히 불타오르게 된다. 光源씨가 사랑에 집착되어 있을 때는, 六修御息所는 교양이 높은 냉철한 여성이 었다. 그러나 蔡上이라는 라이발이 나타나면서 바로 질투가 그 자태를 들어 내는 것이다 . 그것은 그때 種子가 열을 받고 그위에 물이 추가되면서 종자가 싹이 틀때와  닮아 있게 된다는 이치 이다. 이런 말은 괜한 말이긴 한데, 여기서 "種子"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씨앗같이 딱딱한 알맹이같은 존재라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種子"란, 우리들의 행위의 잔영이며,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내는 힘(力)이라는 것이다.

"成唯識論"에서는 이것을 "生果(생과)의巧能(교능)"이라고 부른다. "生果"란 결과를 끌어 낸다는 것, "巧能'은 작용(働)하게 되는 힘을 말 한다. 그리고 "種子"가 阿賴耶識에 저장되는 것을 "熏習(훈습)" 이라고 한다. "熏習" 이라고 하는것은 향내가 언젠지는 모르나 의복에 스며들어 온 것이라고 "大乘起信論"에 쓰여져 있다. 보통으로 의사의 냄새가 난다. 생선가게 주인의 독특한 냄새가 있다, 이런것은 비각(鼻覺)에 의하여 오는것이지만, 이것과는 별도로 인격에서 풍기는 내음이라든가, 향기라는것도 있다. 이런것이 "熏習된 種子"에 의해 나타나는 것들이다. 내면에 축적된 과거가 현실의 그 사람의 "마음"이 되는것은 ,  과거가 현재속에 흡수되어, 현재를 살아 가고있다는 것이 되겠다. 즉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자기가 있다. 이러한 구조가 阿賴耶識이라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에 살고 있다는 것은, 현재가 과거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되겠다. 그렇다고 할 때, 현재에는 전연 자유가 없다는 것인가 하면 ,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에는, 과거에 규정된 제약된 면과, 자유롭게 결단을 하고 가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결단이 과거의 의미도 기능도 변화시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승에게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단련되었던것을 당시에는 불만을 갖이고 한탄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가서는 그것이 오히려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것은 흔히 있는 일 이다. 과거는 현재로 인하여 변했다는 예가 되겠다. 과거는 결코 고정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身, 語, 意의 種子가 阿賴耶識에 熏習되는 것을, 唯識에서는 "現行熏種子(현행훈종자)"라고 한다. "現行"이란 현실이라는 말 인데 구체적으로는 身語意의 行爲를 말 한다. 身語意의 대부분의 行爲가자신의 根底(뿌리밑바닥, 근본) 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曾我量深(Sohka ryojin)선생은, 現行이란것은 현실이라는 것을 말 하는데, 이렇게 말 할떄 실체화 되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現行이라고 하는것이라고 했다("法藏菩薩(법장보살)"). 멋있는 말이다.

얼마전 "日英佛敎辭典"을 보면, 阿賴耶識이 "The store-consciousness" 라고 번역 되어 있어 아주 재미있다고 생각 했다. store라는 단어에는 저장소라든가 창고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적역이라고 하겠는데, 우리들은 store라고 할때, 먼저 상점을 떠 올린다. 많은 물건을 정열 해 놓고, 나머지 물건들을 창고에 보관하는데, 그것을 store 라고 할때. 阿賴耶識이 store의 "마음" 이라고 하는것은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다. 문제는 거기에 무엇을 감추어 놓고 있는가에 있다. 오늘날까지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은 이제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무엇을 熏習시켜 가는가는 우리들의 책임 이다.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 무엇을 어덯게 생각 하는가, 그것들은 우리들이 마음 먹기에 달렸기 때문에 변화 시킬 수 있다. 오늘의 熏習이 본인에 의해 원하는대로 된다고 할 때, 축적되어 있는 과거일 찌라도 한번에 싹 바뀌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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