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種子生現行(종자생현행).

   阿賴耶識의 첫째 성질을 축적되는 "마음"이라는 일면인데, 이를 "現行熏種子(현행훈종자)"라고 한다는 말을 소개 햇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인격의 심층에 흔적으로서 남아 있다고 하는것이 었다. 지금 여기서는 그것에 대응하는 阿賴耶識의 두번째의 성질 "種子生現行"이라는 것을 소개 하겠다.축적된 種子, 즉 경험이, 하나는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환경세계가 되어 나타난다는 의미 이다.

먼저, 사람의 인격이 "변화한다" 고하는것은 어떠한 것인가라고하는것을 알아 보자.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축적하고 있고, 어떠한 과거의 흔적을 심층에저장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사람의 인격이 변화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이런것은 구태여 따로 唯識같은데서 이야기 하지 않아도 상식적으로도 잘 알 수 있는 일면 이다. 그 사람의 풍격(風格)이라든가, 풍미(風味) 즉  향내라고 하는것은, 결코 하루 아침에 급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근 차근 조곰씩 쌓여진 身,語,意 의 행위가, 깊은 마음의 내면(根底)에 熏習(훈습)되어서, 저절로 축적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나 지위로서 어느정도는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인간의 진정한 풍격은 갖이고 있는 물품과 입고있는것 같은것으로서 호도(糊塗)되는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 그자리를 떠났을 때, 바로 그 뒤에 더 멋지고 훌륭하게 보일 수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다. 회사에서는 그정도로 자립성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 퇴직을 하고 나서는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있는 사람으로 되는 수도 있다. 인간의 가치란것은, 세상의 지위와 계급으로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증거 이다. 학생때 은사였던 선생님과같이 치과에 갔던 일이 있다. 여름방학때라서, 선생님은 집에서 입는 평복 차림이었다. 어떤 모양이었냐 하면, 야윈것같은 모양으로 위엄이 있거나 엄하게 보이지도 않았던 선생님은 말 하자면 관록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생이 진료받으러 진료실에 들어 갔을때, 한 환자가 "지금 여기 계셨던분은 어떤분이 십니까" 라고 물어 왔다. 선생님의 풍격에 그 사람은 무엇인가에 얻어 맞은것 같이 되었던 것이다. 永嘉玄禪師(?~713)의 "證道歌(증도가)"에, "매사 혼자서 행하고 매일 혼자서 걸어도, 깨달은 사람과 함께라는 열반(涅槃)의 길, 조신하며 옛 성현의 깨끗함으로 스스로의 풍격을 높이는 구나" 라는 일절이 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진정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자태는 고상한 풍격을 가지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상쾌한 향내가 근처에 떠돌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佛陀의 출가동기라고 전 해지고 있는 "四門出遊(사문출유)"의 최후는 한사람의 沙門(사문,수도승)과의 만남에서 였다. 生老病死(생노병사)와 같은 인생의 모순에 심각 해 졌던 佛陀의 눈에, 沙門의 조용한 한 모습이 시원스럽게 비추어 왔던 것이다. 뛰어난 인간이라고 하는것은, 그저 옆에 있어 주는것만으로도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저절로 고와 지게 한다. 그것만도 아니다. 죽은 다음에도 사람을 감동시킨다. 고승전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인데 "훌륭한 사람은 멀리 있어도 빛난다"(감흥의 말중에서) . 이와같이, 阿賴耶識이 그 사람의 根低(근본이)가 되어, 그 사람을 지탱하게 되는것을 가지고 "阿賴耶識을 諸識의 根本依라고 한다" 라고 말 한다. 阿賴耶識이 근본적인 의지(依)하는 장소가(所)되어, 그 사람의 독특한 인격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阿賴耶識이 사람의 根本依(근본의)가 된다고 하는것은 누구라도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유를 잘 알고는 있지만, 두려운 것은, 그렇게되어 거기서 유출(溜出)되는 자신의 내음이 어떠한 것인지 자신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청결한 감을 주는 사람, 불결한 감을 주는 사람, 예리한 감을 주는 사람, 따뜻한 감을 주는 사람 등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겠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정작 본인 당사자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 무서운 일 이다. 우리들이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눈이 필요한것은 이런것 때문이다. "스승에게 의지" 한다는것, 또는 착한 친구를 가진다는것, 佛道 수행이 중요시되는 이유의 하나가 밝은 눈을 갖인 사람에게서 자기의 외곡된 마음을 바로 잡아 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根本依의 다른 하나의 일면은, 세계의 환경의 依지하는 장所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種子가 現行을 만들때, 하나는 그 사람의 인격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는 외계(外界)로 되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본다든가, 듣는다든가, 또는 느낀다고 하는것들은 확실히 정확하게 외계(外界) 그대로 인 것일까,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적인것만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은것 같다. 거울이 앞의것을 그대로 비추는 것과 같이는 안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보는사람의 힘(능력)"에 따라 외계가 좁혀지면서(狹小해져서) 제약되게 된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거울은 앞에있는 사물을 비추기는 하지만, 흐리게되어 있을때 외곡되어 있을때는, 전면의것이 외곡되게도 중복되어 비추어 지기도 한다. 혹시 Camera의 Lense라고 하는 편에서 볼 때 더 적절할찌도 모르겠다. Lense의 구별(종류)에 따라 외계는 변화되어 온다. 우리들의 감각기능에는 자연히 한계가 있다. 시각(視覺)이라고 하는것에 비추어 볼때, 우리들의 눈은 800m micron에서 390m micron사이의 파장의 광선은 접촉하지 못 한다. 그것보다 파장이 긴 적외선도 짧은 자외선도 볼 수가 없다. 적외선 Films에 비춰진 풍경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되는것과 같이, X-선 촬영때는, 어떤 광선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확실히 우리들의 내부가 투시되어 나타난다. 결국 눈이라고 하는 Lense도 결코 만사가능은 아니라는 것이다. 감각(感覺)에 있어서도 돌고래, 박쥐는 높은 주파수의 음으로 울고 있고,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전연 들리지 않는다. 저주파 공해라고 하는것 마저도 청력의 한계를 초월한것이 되겠다.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저주파의 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취각(臭覺)에 있어서도, 개들은 인간과는 비교가 안될만큼의 예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세계는 다양하게 되어 있다. 우리들이 알고있는 냄새의 세계가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저 우리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잇는 Lense를 통해서만 외계를 알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감각으로 알게된 외계를 절대라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데 불과하다고 하겠다. "吾人이 말하고 있는 세계의 사물은, 우리들과 같이 생긴 인간이 본 사물이었고, 그것이 사물의 전체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조고만치도 알 수 없다"(寺田寅彦"物理學과感覺") 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감각의 인식능력의 문제이지만, 唯識의 阿賴耶識說에서 지적하고 있는것은, 그 저변(低邊)에 있게 되는 인격(人格), 지식, 교양,취미,기호, 알게모르게 몸에 배어있는 문화적 전통과 가치관 같은것이 전체적으로서의 인격성이 외계의 인식을 한정 짓고 있다는 것이다. 감각기능과 같이 확실성 있는 수치를 제시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됨됨이라든가, 인격성이라고 불리우는 만져지지않는것들의 불확정 요소가 시력과 청력과 같은 외계의 인식을 한정 하고 있다는 것이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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