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唯識三十頌(유식삼십송)",

玄奬三藏이 번역한 유식삼십송을 가지고 유식론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이제까지 읽어 왔던 것이 다 무효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외냐하면, 그것은 거이가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같이 읽어갈 책은, 唯識三十頌要講 增補改訂(유식삼십송요강 증보개정) 中山書房 佛書林(중산서방 불서림)太田久紀(Ohda Kyuki)의 책 이다. 이렇게 하기로 한 제일 큰 이유를 한마디로 말 한다면, 이렇게 하는것이 唯識說을 공부하는데 좀 더 질서적으로 배울 수 있고, 도움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먼저 사용했던 책이 "成唯識論"을 바탕으로 유식론을 이야기 했다면, 지금부터 우리가 읽으며 공부할 책은 "唯識三十頌"을 기반으로 成唯識論(이 論은 唯識三十頌의 주석서이다)을 이야기 한다는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내용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되겠다. 변명아닌 변명이 너무 길었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1. 稽首歸依(계수귀의) 한다. (歸敬頌'귀경송')

 稽首唯識性  (1) 唯識의 性에 관하여, 

 滿分淸淨者      滿으로 分으로 稽首 한다.

 我今釋彼說  (2) 我(나) 今(이제)彼(그의) 說을 釋(석)하여

 利樂諸有精      諸有精을 利樂을 서서히 더 해 간다.

1). 작자는 누구,

  (1)을 歸敬頌(귀경송) (2)를 發起頌(발기송) 이라고 한다. 둘 다를 가르켜서 宗 前敬 敍文(종 전경 서문) 이라고 부른다. 어쨋던 三寶(삼보)에 귀의(歸依)한다는 마음가짐의 표현이다. 이것은 "유식삼십송"의 본문은 아니고, 누군가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붖쳐 넣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있다. 그 누군가는, 아마 인도의 안혜보살(安慧菩薩 470~550)이 아닐까하며 오랜동안 전해 져 오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가 되면서 안혜의 범문이 발견, 공표된것을 보면서, 전승된것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확실한것은, 누구의 작품이라고 단정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頌노래송)"의 성질로 볼때, 작자가 누구라는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삼보에 귀의한다라고 하는 마음 가짐을 광덕(光德)들이 기술한 것이고, 우리들도 다 같이 "頌"을 통하여, 삼보에 귀의한다는 마음가짐을 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과 그 체험으로의 순수한 귀의의 마음가짐과 사람들에게 열린 정신의 표명 인 것이기 때문이다.

2). 오체 투지(五體投地), 唯識性.

 稽首(계수)라는 말은, 머리를 땅에 댄다는 것, 오체라는것은, 머리, 두팔, 두다리, 그것을 땅에 던지며 넙쭉 업드린다는것,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는 예(禮,절하는것)라고 알려져 있다.(大字典). 계수 오체투지의 대상이 되는 자는 누구인가, "滿으로 分으로 淸淨(청정)한 者" 이다. "滿淸淨者(만청정자)"는 佛, "分淸淨者"는 보살(菩薩) 이다. 불 보살 앞에 오체투지 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불 보살의 정신 내용이 되느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唯識性" 이다. "唯識性"이란 무엇인가. "成唯識論" 券九에 그 정의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의

  (1)은, 虛妄(허망),  遍計所集 性(편계소집 성)

  (2)는, 眞實(진실),  圓成實性(원성실성)

2)의

  (1)은, 世俗(세속),  依他起性(의타기성)

  (2)는, 勝儀승의),  圓成實性(원성실상)

편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고 하는 말에대해서는, 뒤에 "三性說(삼성설)을 배울때 상세하게 알게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1)의 (1)과 2)의 (1)에 대해서만 설명, 주목 해 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흥미스럽다는 점은, 즉 불, 보살의 정신내용이라고 생각되는 것 중에, "허망" "세속"이라고 하는 불, 보살의 정신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것일까. 그것은 유식이 나타내려고 하는 인생의 진실은, 결코, "진실", "승의(최고의진실, 진여의 실상)"라는 말로 나타나게 되려고 하는 깨끗한 일면만이 아니고 Minus 요소라고 생각되는 일면도 포함하게 된다는 것을 말 하려고 하는데 있다. 그것은 인생의 유한성과 오염성이라는 부분이, 인생을 추구할떄 불가결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자기의 유한성과 오염성 같은것에 깊은 자각 없이 영원성도 청정성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불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지만, 그중에서도 唯識은, 현실의 인간 존재의 실태를 있는 그대로 똑똑히 보면서, 거기서부터 인생을 새롭게 창조 해 나가려고 하는 태도에 강한 불교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성과 오염성과 암묵성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있는것이다. 오염성에 자성없이 청정성을 추구 할 수 없고, 유한성과 암묵성의 자각없이 인생의 진실은 개시되지 않는다. 어두움을 인지하는것은 빛에 노출(접촉)되었다는 것이고, 빛과 만났다는것은, 동시에 암암(暗闇)의 자기와 대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명과 암은 일체불가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Minus영역이 포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옛부터 의론 되었던 모양으로, 子조의 眞興(934~1004)"唯識義私記(유식의사기)", 중국의 智周"成唯識論演秘(성유식론연비)",  如理""成唯識論疎義演(성유식론소으연)", 雲泰"同疏抄(동소초)", 道邑" 同義蘊(동의온)" 일본의 信叡, 仲算 등의 說들이 소개되어 있다. 너무 전문적임으로 여기서는 언급하자 않는것으로 하겠다. 그러나 이중 "唯識義私記"에 있는 내용만 간단히 소개하면 (1)허망식(虛妄識)이 소견(所見)이기 때문에 유식성에 포함 된다 (2)여하간 식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유식성에 포함된다고 기술 하고 있다.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허망의 상(相모양) 이외 아무것도 아니고, 勝義(승의)라 하더라도 돌아가면서 변하여(遷變) 흘러 가버리는 (流去) 세속의 현실을 떠나 있는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속측에서 보면, 흘러가면서 쉴새없이 변하며 유전(流轉)하는 현실이고, 勝義쪽에서 보아도, 遷變(천변)하며 흘러 가버린다는 진실 이다.

3. 滿 또는 分으로 淸淨하는 者,

  어쨋던, 불과 보살은 그것에(허망과 세속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말 할 수 있다. "滿(만)"은, 원만, 완전 하다는 의미이고, "분(분)"은, 少分(소분), 부분이라는 뜻이다. (滿淸淨者 = 佛, 分淸淨者 = 菩薩(보살)). "淸淨(청정)이란, " 二障都盡(이장도진)" ("述記" = 基(기)의 "成唯識論" 유식삼십송의 주석서)이라고 기술 되어 있다. "二障" 이란, 번뇌장(煩惱障), 소지장(所知障) (後述)을 말 하는데, 한마디로, 불도를 수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지적 , 정적 인 "마음"의 작동을 말 한다. 불 보살이 됬을때는 그것이 대부분 멸진 되게 된다고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서는 허망, 세속의 Minus 영역은 다 처리 되었다는것을 의미 한다. 

"都盡(도진)" 이란, 소극적 . "淸淨(청정)" 이란, 적극적으로 불, 보살의 정신적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것으로 생각 된다."述記"를 통하여 五體投地 하며, 稽首해야할 대상은 누군인가에 대하여 음미 했다. 이제는 우리들은 무엇에 稽首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아야 겠다. 

(1) 法에만 계수 한다. 사람은 불포함.

(2) 사람에게만 계수한다.

(3) 법에도 사람에게도 다 계수 한다.

(4)불법승 삼보에 계수 한다

상기한 4석(釋)에는 나름대로의 종교적인 깊은 맛이 있지만, 善然(~1560)은 그의 저서 "成唯識論泉抄(성유식론처초)"에서, 두번째 釋이 正義(정의)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로, "만분청정자(滿分淸淨者)"에서의 者는 구체적으로 사람을 가르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述記"에서는 "正義는 本釋二師에 歸依하는것을 取한다"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증거로 하고 있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피가 통하고 있는 인물, 그것을 계수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추상적, 관념적인 진리와 이론이 아닌것. 종교란 아마도(십중팔구는)이런것이 아닐까 해 본다. 비어지면 피가튀어 나와 흐르는 한 인간의 심연에 발이 꽉 닿아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겠다. 이론이라든가 주의 주장과 체계같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인 그 자체라는 것이다. 진리라는것은, 한사람이 인간의 행동에 의해 거기에 현성 한다. 우리들은 사람을 통하여(介) 진리와 만나게 된다. "釋(석)' 이란, 解釋開演(해석개연)의 釋. "開(개)"란, 그윽하게 숨겨놓은 (幽隱)것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분명한 상태로 설명 된다는 것이고, "演(연)"은, 간단하게 설명된것을, 넓게 자새하게 담화(談話)한다는것 이다. "有精(유정)"이란, 감각과 감정을 가진자라는 의미. 梵語(범어, 싼스크릿 어) "삿도와" 의 번역어 이다. "衆生(중생)"이라고 번역되는데, "述記"는, (1).精識(정식)을 하는자 (2). 精은, 본성(本性)의 의미 이기 때문에 그 본성(타고난성질)을 가진자. (3). 精이란, 愛(사랑애)의 의미이기 때문에 愛를 有하고 있는자라고 하는 세가지의 해석을 하고 있다. 사람의 고민의 근원은, 精. 愛를 희구(希求)하는 것이기 때문에, 슬픈 인간의 실상을 잘 포착한 표현이라 고 생각 한다. "愛라고하는 말에는 두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慈愛(자애), 愛語와 같은 좋은 의미의 愛이다. 범어로 "도우리쥬나~". 두번째는, 執着(집착)이라고 하는 Minus적 개념 이다. 범어로 "푸레~마"라고 한다. "有精"이라는 의미가 이러하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天人(천인)도 동물도 지옥에 살고 있는 것들 모두, 전부를 포함 한다. 이 우주에 우리와같은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것들을 "有精"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떄, 우리 모두는 상하의 다름이 없다는 것이 된다. 一切平等(일체평등). 같은 이 지구에 살아가고있는, 같은 생명을 살고 있는 동료 인 것이다.

4. 佛道로 부터 얻게 되는 利 樂, 

"利樂(이락)"이란, 有精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는것. 有精들이 안락(安樂)하게 되게끔 노력(勤)하는것을 말 한다. "述記"에는 十利五樂이라고 하는것이 기술되어 있는데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利는 이익, 미래를 도와 준다(濟건널제).

   樂은 안락, 현재를 도와 준다(濟).

2) 현재를 利하게하는것을 利.

    미래를 益(더할익)하게 하는것을 樂이라고 한다.

3) 善을 받아드리는것을 利.

   惡을 떠나는것을 樂이라 한다. 

4) 惡을 떠나는것을 利

   善을 받아드리는것을 樂이라한다.

5) 苦(고)에서 벗어나느것이 利

   樂을 받아드리는것을 樂이라한다.

6) 智(지)를 깨닫는것이 利

   福을 깨닫는것을 樂.

7) 出世의 善을 利

   世의 善을 樂이라 한다.

8) 小果(소과)를 깨닫는것을 利

   大果를 꺠닫는것을 樂이라 한다.

9) 利樂은 一體(일체) 異名(이명) 이다.

10) 略

무엇이 정의 인가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여러가지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3과 4항목 해석에서는 명백하게 역설이다. 이러한 나열적 주석에서는 한가지것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해석하게 된다는 면을 취하면 된다. 조급하게 결론을 찾으려고 하지않는 유연한 태도가 느껴 온다. 정말 깊은 맛이 있는것들이 많이 있다.

"樂"에서는 五樂이 거론 되고 있다.

1) 因樂(인락), 안락을 받아 멈추게하는 것. 身體. 心같은것

2) 受樂(수락), 境을 안락으로서 받아 멈추게하는 감각. 감정.

3) 苦對治樂(고대치락), 고통이 取除된 안락

4) 受斷樂(수단락), 통상의 감각과 감정을 斷滅(단멸)시킨 선정의 안락.

5) 無惱害樂(무뇌해락), 번뇌(煩惱)가 없어진 究極的인  안락.

"無惱害樂)에 대하여, "述記"는 (1). 山離樂(산리락), 출가. (2). 遠離樂(원리락), 청정한 세계에 태어나는것.  (3). 寂 靜락(적 정락), 열반. (4). 覺法樂(각법락), 苦提(고제)라고 기술하고 있다. "樂"의 분석 방법이 "利"의 분석보다 조직적인것 같다. 踐(얕을천)보다 深(깊을심)으로, 俗(속) 보다 聖(성)으로 라고 하는 질서위에서 정리 되어 있다고 하고 싶다. 종교에서도, 불교에서도, 논ㄹ적인 선악의 일면이 먼저 상기되어지는 경향이 있 는것 같이 생각 되지만, 실은, 그 속 깊은 곳에서는 안락, 안식 이라고 하는 다른 하나의 깊은 감동의 안온한 세계가 있다는 것에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생각 한다. 佛道에서 우리들이 얻어 가지게되는 것은 善 이라느것, 淨(깨끗할 정)것을 얻어 가지려고 하는 것인데, 또 하나 다른것 "안락"이 있다는 것에 나는 감동 한다. 佛道 수행이란, 모든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자기연마에 전심(專心)한다고 하는 긴장감에 충만한 삶의 방법만이 상기되는 것은 아닐까 하겠지만, 悠容(유용)에 쫒기지 않으며, 인생의 깊은 감응을 확실하게 맛 보며 즐긴다고 하는 , 자연적인 편안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한다. 수행이란,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수단 방편이 아니고, 그것이 직접적인 목적이 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수행이라고 하는것은, 그러한 성격을 根底(근저)에 潛在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시적 수행이 그대로 佛道의 奧義(오의)이다. 유연하게 남산을 바라본다, 거기에 둘도 없는 인생의 극치가 있다.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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