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현장삼장법사역

2024.10.20 11:19

김일하 조회 수:3

4. 세개의 "마음" (一). (제1頌 4句)

 此能變唯三, 이(此) 能變(능변)은 오직(唯)세가지(三) 뿐 이다.

그렇다면, 여러가지 "我(아)" "法(법)을 만드러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가 이세개의 "마음"에서 만드러 진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能變(능변)이라고 하는 말(語)로서 我. 法을 만드러 내는 말이라고 포착하고 있다. 이 "能變"이라고 하는 번역어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론(議論)이 있다. 그 요점은, 원어인 梵語(범어, 싼스크릿 어)는 '비리나아마' 인데, 유식30송 1송 3구와 4구에서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3구에서는 "所變(소변)", 4구에서는 "能變(능변)이라고 번역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동의어가 사로 다른 말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 된다. 예를들면, 長尾雅人(장미아인) "中觀(중관)과 唯識(유식)"(岩波서점)에서는, "첫째로는, 그들의 견식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하는 친절에서 그렇게한 것은 아닐까 하고 있다. 또는, 中國人士들의 이해 방법이 능소적(能所的)이지만, 보통으로 인도에 있어서도 世親(세친보살) 이후의 시대에서는, 能所로 분석하여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라고 말 하고 있는것 같다. 또 結成令聞(결성영문)"唯識30頌"(大藏출판) 에서는, (1)범어의 격변화, (2)파리나마라고 하는 말의 의미,(3)교리면 라고 하는 3 각도에서 라고 설명 되어 있다. 어찌되었던, 현재로서는 금후의 연구를 기대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 이다. 나는, 玄奬三藏(현장삼장)이 번역 할 때, 방법도, 이유도 없이 독단적인 해석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무슨 이유가 있었고, 그에따라 "能變(능변)" 이라고 번역 했을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를 밝힐 능력은 나에게는 없지만, 三藏이 인도에서 唯識 수학 도중 "마음"의 능동성이라는 깊은 놀라움속에서, 그 학불도상(學佛途上)에서의 체험에 기인한 만사승지상(萬事承知上)에서, "能變(능변)" 이라고 번역한 것이 아닌가 믿고 있다. 소전추안(所詮推案)에  불과하지만, 唯識전문용어의 번역이라는 근거에 관계되는 중요한 언어이기 때문에 되는대로 번역어가 결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成唯識論(성유식론)에 따르면, 어쨋던 번역이 十師(십사)의 설을 취사선택 했던 합유역(合糅(주물 유)譯)이 었다는 것을 기억 한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겠다. 중요 단어에 三藏의 견식이 묻어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 번역된 언어를 통하여 三藏의 진정한 정신을 찾아보고 싶었다고 생각 했다. 나는, 唯識佛敎의 "마음" 이해의 특징의 하나로 "능동적이라는 것으로 포착(捕捉)하고 있다" 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 언어 "能變"에 엉켜 붙어 있는것 같은(사실을 사실에 근거한다는것으로) 답습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三"이란, 初能變(초능변), 제二能變, 제 三能變을 말 한다. "初能變"은, 第八阿賴耶識(제 8 아뢰야식), "제 二 能變"은, 第七末那識(제7마나식), 제 三能變은, 前 六識 (전6식, 안,이,비,설,신,의 의 6식) 을 말 한다. 그 8識 전부가 한가지 용력(用力)에 의해 능동적으로 그 사람을 변하게 하고, 그 사람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우리들을 둘러싸고 수많은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들은 거기로부터 발생하는 정보를 먼저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그 뒤, 거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아닌지. 唯識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상식적으로는 수동적으로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 드리는 기관이라는 생각되는 5官(관)의 작용 자체에 이미 능동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제 三能變  이다. 태양도, 달도, 별도, 산천초목, 유정(有精), 삼라만상, 이런 저런것 = 所變(소변)의 相(모양) 같은것이 겨우 이 "三"의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5. 셰개의 "마음" (二) (第二頌 , 一句, 二句)

   謂異熟思量,   말하자면(謂), 異熟(이숙)과 思量(사량)과

   及了別境識,   또(及) 了別境識 료별경식) 이 된다.

그것은 異熟識(이숙식) 과 思量識(사량식과 及(미칠급) 了 別境識이 된다. 즉 앞의 노래에서 "三能變"이라고 하는 형태를 소개했던 "마음"이 여기에 구체적으로 나타 나 있다.

初 能變      = 異熟識(제 8 식)

第 二能變   = 思量識(제 7 식)

第三能變    = 了別境識(前 6 식)

"異熟識"은 唯識이 포착하고 있는 8 識 중 가장 근본이 되는 제 8 識의 다른 이름 이다. "異類로서 熟 한다"라고 하는 의미인데 "과거를 등에 지고 있는 자기" 라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떼어놓고 살 수는 없다. 살아 왔던 과거 것들을 떠나서 지금의 나는 없다. 인격의 밑바닥에는 과거가 살아 계속되고 있고, 그 과거가 현재로서 숙성 되고 있다. 현재의 자기는, 과거의 집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과거의 자기의 기반에 따라, 현재의 자기를 변화시키며, 또 자기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여러가지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사람은 , 풍요로운 세계를 가지게 되지만, 축적되어 있지 않거나 그것이 적은 사람은, 세계에서 현시(顯示) 될 수가 없다. 제 2의 "思量識"이란, 문자 그대로 생각을 量(헤아릴 량)하는 "마음" 이다. 무엇을 헤아리며 생각하냐 하면,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되겠지만, 자기만의 일 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에 집착하며, 자기를 중심으로 한(축으로한) 좁은 각도로만 생각하며 행동 한다. 자기의 손(損) 득(得), 자기가 좋와 하는것, 싫어하는 것에서 떠날 수 없다. 넓은 시야로의 "마음"을 열게 되질 않는다. 정신적인 시야협착 이다. 그런데서 사람도, 세계도 협익(狹溢)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일 밑에있는 識(8 식)에서는, 자기가 걸어온 과거에 의하여 인격성이 한정 된다. 그것이 "初能變". 그 위의 識(7식), 자기중심적 사소에 의해 흔히 한계가 좁혀지고 외곡되어 간다 그것이 "第二能變".

"了別境識"은 대상(境)을 명확하게 분석하면서 인식하는 "마음" 이다. 구체적으로는, 안식(시각), 비식(취각), 설식(미각), 신식(촉각)의 "前 五識" 과 "第 六 意識( 知, 精, 意)" 이다. 여기서 인식은 크게 한 틀을 만들게 된다. 五官(5관)의 기능과 능력에 의하여 식별되는 범위와 정조(精粗,감정을 따라 일어나는 느낌) 가 변화 한다. 아무리 눈을 부릅 뜨고 보아도 인간의 눈에는 자외선도 적외선도 X-선도보이지 않는다. 사물과 사물사이에 작용한다는 힘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또 흥미도 관심도 없는것에는 눈도 주지 않게 되고 의식도 그곳을 외면 한다. 즉 지식과 교양과 취미기호와 같은 ,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적 경향이 인지하고 그 범위를 한정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第三能變"이라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인간 이해가 중요하다고 하는것은, "初能變" 과 "第二能變"은 인간의 잠재적인 심층심리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인격을 8층의 중층적인 것으로 한다는 이해의 각도에서 볼때, 그중에서 두가지 識(8識고 7識), 즉 1/4이 심층으로 포착되고, "三能變"이라는 각도에서 볼때는, 실제로 "마음"의 2/3가 심층의 것이라고 생각되게 된다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마음"을 "第三能變"의 각도에서 보려고 하고 있다. "마음"을 중층적으로 하는 이해는 "마음"을 실체시 하는 위험성이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마음의 이해 때문에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된다는 것으로 알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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