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 13:29
8. 無性有情(무성유정)에 관하여,
유루(有漏)의 聞熏習(문훈습)에 대하여, 하나 확인해 두어야 할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無性有性(무성유성)과의 관계이다. 예를들면 "무성유정(無性有情)이라 하더라도 불교에 접촉 할 수 있다는 것이다. "無性有情" 이란, "本有(본유)의 無漏(무루)種子(종자)" 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말 한다. 마음의 청정성(淸淨性)의 가능성을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 이다. 뒤집어 이야기 한다면, 吾我名利(오아명리, 자기의 명리만을 생각하는 사람) 의 생각, 즉 自我顯示欲(자아현시욕)과 自我主張(자아주장), 利己성(이기성) 내지 자기중심적 사유가 강한 사람이 되겠다. 이런 사람이 현실에 실재하고 있다고 단언하는것이 대승불교(大承佛敎) 중, [成唯識論(성유식론)]의 독창적 사상의 하나이다. 이런 경우, 그런 사람은 無漏(무루)종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처와 같은 경지에는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하느것은, 일체중생의 구제가 거부된다는 는것을 의미하게 되어, 종교로서 이런것이 좋은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나는 여기서 이 "無性有情"의 사상에 대한 사적감성이 되는 것이겠지만 두가지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는 인간 관찰의 예리성이고, 두번째는 내성의 심도(深度)이다. 불교의 역사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인간관찰, 자기탐구의 역사 였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떠한 불교 교설도 거기를 떠나서는 성립이 안 된다. 흔히 唯識을, 인간의 현 실태에 꼭 들어 맞게 관찰을 깊이 한 불교의 하나의 학계라고 들 말 한다. 즉 그런 현실감에 잘 들어 맞게 관찰을 철저히 하고 있는것이 유식불교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唯識을 , 불교 기초학, 또는 학문불교라고 부른다. 그런 이유로 현실을 떠난 이론성에 집중, 즉 이론성이 높은 불교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사실 그런면이 전연 없다고도 할 수도 없겠지만, 그런 이론적인 모순 앞에 서 있게 되는 중심점(과녁)은 생사를 유전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태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에 대한 관찰의 예리함이, 無漏種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을 색출 해 낸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현실과의 만남의 체험속에서 "無性有情(무성유정)" 이라고 하는 사상이 나오게 된것은 아닐까. 냉철한 눈으로 포착한 인간의 한 측면상(一側面像)이라 하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확인 해 놓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無漏種子가 없다고 하는것은 그냥 그대로 극악죄인을 가르킨다고 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無漏種子라는것은, 자기의 眞相(진상, 참모습)이 無常(무상), 無我(무아), 空(공) 이라는 진실을 증득(證得)하는 능력을 말 한다. 無漏種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직접적으로 법률적, 윤리도덕적으로 악인이 된다고 의미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종교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 훌륭한 인격자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無漏種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엇이 결여되어 있을까 하는 것인데, 그것은 無常, 無我 라고 하는 자기정체의 자각이라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라도 빠진거 없이 완전 하다, 순수한 경지를 느끼지 못 한다. 유아독존적 이다. 나는 거기에 인간 응시(凝視)의 강력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능관자(能觀者)는 내가 佛(부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처님만이 "無性有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無性有情"의 교설로 부터 수취(受取)되는 또 하나의 것은, 자기성찰의 깊이 라는 것이다.사람은 자기성찰을 깊이 한다고하는 행위를 거듭하는것에서, 자기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汚染汚濁(오염오탁)의 자기를 발견 할 수 있게 된다. 단 한가지의 청정성(淸淨性)도 진실성도 찾아 내지 못하는 자기를 만난다는 것이다. 타인의 일이 아니고 자기내에서 라는 것이다. 불교의 정도(正道)는 자기 내면과의 대결 이다. 흥미를 가지고 타인을 관찰한다던가 인간을 분석, 분류하는것이 아니다. 唯識도 심리분석, 분류에 의하여 "마음"의 연구를 상세하게 전개를 하지만, 그것은 결코, 흥미 본위로서의 인간 관철이 아니다. 단 한번,두번도 없는 이 인생을 자기 책임하에서 어덯게 살아 가야 하는가를 추구하는 것이다. "無性有情" 교설의 근본이 되는것도 다른 사람에의 제3자적 관찰의 예리함이 아니라, 깊은 자기와의 만남이 안일까. "그들에게는 불심(佛心)이 없다"라며 비판 하는것이 아니고 "우리들에게도 한조각의 불심도 없다"라고 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새어 나오는 탄성이 "無性有情"의 교설로서 결실 되었던 것은 아닐까. 실은, "자기는 無性有情이다" 라고 단언하는 데에서도, 자기가 자기를 단정하게 되는 교만함이 있다고 생각 되면서, 쓸데없이 입에 담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無性有情이라고 佛前에서 누설하게 되는 탄식이 인정되는것으 아닐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탄식의 뒤에, 어떠한 길이 남게 되는 것인까. 그 하나는 如來(여래,부처님)의 攝取不捨(섭취불사)의 대원(大願)을 바란다고 하는 절대능력의 믿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원속에 "無性有情'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일까. "無性有情"이기때문에 "倽(버려질사)해지는것은 아니다"라고 如來는 말씀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成唯識論]은 이것을 직접적으로는 나타 내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成唯識論은 그 답으로서 제시하고 있는것이 "有漏聞熏習(유루문훈습)이란 것이다. 앞에서 인용했던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번 복습 해 보자.
문훈습은, 유루성의것만은 아니다. 정법을 들을 떄, 유루의 문훈습은 본유의 무루종자에 작용하여 그것을 풍부하게 한다.
聞熏習(문훈습)속에서,
1. 有漏性(유루성)인 것은,
1) 修道(수도)로서 끊게 되는것
2) 뛰어난 자기를 감지 하는것
3)청정한 출세법의 간접적인 조연(助緣)이 된다는것
2. 無漏性(무루성)인 것은,
1) 도중에서 단절되는 경우는 없다는것
2) 출세법(出世法)의 직접적인 정인(正因)이 된다는것
1. "문훈습"은 正法을 묻는것이기는 한데, 그 많은 부분은 유루성이다. 외냐하면 唯識은, 인간을 末那識(마나식)을 가진것이라는 구조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나식은 아집의 "마음"의 근원이기 때문에, 마나식이 있는한은, 인간은 유루성에서 벗어 날 수 어렵기 때문이다.원래는 청정이야 할 정법이 마나식에 오염되어 유루화(有漏化)되었기 때문이다. 문훈습에서 유루성이란것과 무루성이 있다고 하는 지적은 중요한 것이다.
2. 그 유루화( 된 문훈습의 종자는, 긴 수행기간 속에서 단절 된다. 최종적으로는 출세법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유루는 무루의 正因(정인)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3. 無性有情(무성유정) 이외의 사람은, 본유(本有)의 무루종자(無漏種子)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예를들면 훈습되는 것이 유루의 종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본유의 무루종자에 작용되어그것을 풍부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루의 문훈습이 없다면 무루종자는 현기하지않느다"(述記는)라고 말 하고 있다. 유루의 문훈습이 커다란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 해 볼때, 유루와 무루는 我와 無我가 되는 관계이므로, 상호 상반하며 부정하며 만나는것 같은 정반대의 성질들인 것이다. 그런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유루의 문훈습이, 정반대의성질인 무루의 종자를 도와서 즉 增上緣(증상연)이 되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정인(正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루의 문훈습의 아주드믄 중대한 역활을 부여 받게 된다는 것이다.
4. 그런데 무성유정에는, 무루의 종자가 없기때문에, 정법을 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무루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5. 그렇다면, 유루의 문훈습은, 확실히 쓸모 없다는 것일까. 그게 그렇지가 안다는것이다. "勝 異熟(승 이숙 )을 감지 한다" 라고 述記가 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뛰어난 인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無性有情(무성유정)" 이외의 사람들이라면, 무루의 종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루의 문훈습도 무루의 종자의 도움을 받게 됨으로 서로 상대를 살려 나가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성유정"의 경우에는 무루의 종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떠한 정법을 들었어도, 그것이 조연이 되어 무루의 종자가 풍성하게 되지 않는다. 유루의 경역(境域)을 한 발자국도 뛰어 넘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럼에도 그와같은 유루성의 것이라 하더라도 문훈습은 "勝 異熟(승 이숙)"을 감지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전연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는것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유루성의 문훈습이 勝 異熟(승 이숙)을 느끼는가"라고 하는 원측이, 그냥 그대로 무성유정에 도 적응 되는가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이 되겠다. 이것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도 하고 있지 않다. 무성유정은, 예상한대로 유루의 문훈습에 의해, 勝 異熟(승 이숙)을 느끼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유성무정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여 진다는 것이다. 에를든다면 유정이던 않던 문훈습을 더하여 주기 때문이다. 문훈습을 더하여 주게 된다면 불타의 영역에 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타의 영역에 도달 한다는것이 어렵다고 할 찌라도 그것을 배울 정도는 될 것이기 때문에, 무루의 종자를 현기시켜 근본적으로 인격이 유루에서 무루에 전환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을까. 불법에 접촉 된 인격이 만들어져 간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루의 종자가 없기 때문에 成佛(성불)은 안된다 하더라도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로 되는 것이 가능 하지 아닐까. 聞法(문법)이 누구라도 勝 異熟(승 이숙)을 감지 한다 라고 하는 말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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