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30송" 현장삼장법상 역

2024.12.26 12:00

김일하 조회 수:11

3. 帶質通情本(대질통정본),

  三類境(삼류경)의 마즈막은 "帶質境(대질경) 이다.

사물이 있기 때문에, 주관이 제멋대로 만둘어 내는 對境(대경)을 말 한다. 앞에서 설명한1.性境 이라고하는 것은 사물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고, 그 自相을 외곡됨이 없이 포착했을때의 對境이고, 2. 獨影境(독영경)은, 性境과는 반대로 주관을 제 멋대로 만들어 내는 對境. 여기서 이야기 할 3. 帶質境(대질경)은 그 중간적인 성격을 對境으로 한다고 하면 되겠다. "帶"란, "挾帶의 義"라고 述記는 말 하고 있다. 딱 맞게 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붇친다는 것을 의미 한다. "質"은 本質(본질). 존재하는 사물 자체, 사물이 거기 존재하고 있는데도, 그 사물을 직접 對境으로 하지 않고, 주관이 생각을 여러 방향에서 투입하면서 對境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물 자체(본질)와 우리들이 포착하려고 하는 對境과의 사이에 간격(차이)이 있다고 하면 되겠다. 넓은 의미에서의 착각이 여기에 해당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TV화면을 보고 있을떄, 보고있는것은 평면의 화면에 불과 하지만, 몇백키로의달 하는 히말라야의 깊숙한 곳 까지를 보고 있다든가, 마라톤을 하고 있는 선수를 보면서, 그는 그저 상하로 상체를 움직일뿐인데도 이선수는 지금 코스를 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것 같은 것이다. 그런데 帶質境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제 7 末那識이, 제8 阿賴耶識을 대상으로 하는 때 이다. 阿賴耶識은 본래는 無我의 自己이다. 그런데도 末那識은, 無我인 阿賴耶識에 대하여 불변의 自我라는 허상을 구축하며 실체화하고 고정화하여, 거기에 집착하게 하고 있다. [論]은 이것을 "自心이 相을 起 한다"라고 설명 하고 있다. 이 경우, "본질은 阿賴耶識인데, 末那識을 묘사하는 자아상은 末那識의 "相分"이 된다는 것이다. 본질은 阿賴耶識이기 때문에 無我 이고, 無覆無記(무복무기) 인데. "相分"은 末那識의 "相分" 이니까 我 이고, 有覆無記(유복무기)가 된다. "本質"과 "相分"사이에 간격(차질)이 생겨 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末那識과 阿賴耶識의 관계는 佛道 수행상에서 아주 중요한 "帶質境"의 하나가 된다. 즉 "帶質境"은, 見分과 本質과의 사이에서 영향을 받게 되는 관계 이므로, 이것을 [論]은 "帶質은 情(見分) 과 本(本質) 과 通 한다" 라고 말 하고 있다.

本質에 대하여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 "이제까지 "本質"은 사물 그자체 라고 말 하여 왔는데, 사실은 阿賴耶識의 "相分"이 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法相二抄卷]에서는 "相分의 본래의 形(형상)" 이라고 설명 하고 있다. "사물자체"라고 할 떄, 우리가 유추하게되는 것은, 외계에 실재하고 있는 사물 그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은 그것이 阿賴耶識의 "相分"이 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것은 "本質"이라고 하는것은 외계에 실재하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고, 阿賴耶識에 의하여 한번 "意義(의의) 되어" 포착되어 진 것라는 것을 의미 한다. 인도 사람들에게, 간지스 강의 "물"은 "聖化(성화) 된 "물" 이며 그외 결코 아무 다른 "물" 도 아니다. 그 "聖化 된 물" 이라고 이름 붙쳐진 "물"이 "本質"이라는 것이다. 즉 阿賴耶識에 의하여 "聖化 된 물"이라고 하는 意義가 뭍쳐졌고, 그것이 "相分"으로 포착되어, 그것을 眼識(안식)이 보게 되는 것이다. 阿賴耶識이 대상(對象)의 장소를 중복시켜서 생각 해 내려고 하는 이중 구조를 떠 올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해 본다. 다시 말 해서 우리들은, 자기의 소질과 능력과 지식과 몸에 익숙 해 진 문화 같은 것을 초월한 인식같은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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