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4 11:30
12. 阿賴耶識의 작동. 五遍行((5편행)의 心所(심소) ,第三頌 二, 三句
제 3송의 2,3句에는 阿賴耶識과 같이 작용(働)하는心所(마음)이기술되어 있다.
常與觸(상여촉) 항상 觸, 과
作意受想思(작의수상사) 作意, 受, 想, 思 들과 與(같이 여) 한다.
"마음"은 어떠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작용(働)하고 있다. 정지하여 作働(작동) 하지 않는 "마음" 이란 없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으로 생각한 관념적인 것에 불과 하다. 그 작용(働)하는 "마음"을 분석한 것이 心所 이다. 즉 "마음"의 작용(働)인 것이다."마음"은 구체적으로 心所라고 하며 포착 된 것을 말 한다. 이런 의미에서 心所論은 자기의 구체상(具體相) 즉 자기의 구체적인 모양이 되겠다. "30송"에서는 뒤의 제 9송에서 14송에 걸쳐서 상세하게 소개는 하겠지만, 阿賴耶識에서 어덯게 작동하게 되는 相(모양)을 알기 위해서, 여기서는 5 遍行의 心所에 대해서 만 소개 하려" 한다. "遍行(편행)이란, 어더한 마음이라고 해도 그것이 작동 할 때는 반드시 함께 움직이는 "마음" 의 작용(働)을 말 한다. 阿賴耶識도 識의 하나임으로 遍行의 心所와 같이 作働(작동) 하게 된다. 즉 "觸" "作意" "想" "思"의 다섯과 같이 作働 한다는 것이다.
1)."觸".
觸이란, "3개가 화합하며 變異(변이)하면서 분별 한다"라고 [論]은 정의 하고 있다. 3개라고 하는것은, 根(신체와 신경), 境(대상), 識(감수작용,식별작용)의 3개 이다. 이 3개의 요소가 서로 접촉하며 만나며 변하여 다른것을 만들게 되는 것을 말 한다. 즉 根, 境, 識이 3개가 만나게 되면서, 인식이 처음으로 성립 한다는 것이다. "根"의 결함이 있을 경우에는 그 인식이 성립하기 어렵게 된다. "根"과 "識"이 완전하다고 해도, "境" 과의 만남이 없으면, 이것 역시 인식은 시작되지 않는다. (불교의 근원이 되는 緣에서 모든것이 일어난다 라고 하는 진실이 인식성립의 startline이 된다는 것이라 해도 되겠다)이 "觸"에서 주의 해야 할 점 3개가 있는데, 첫번째가 "境" 이다. "마음"에 나타난것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따난 외계(外界)가 실재 할 수 없다는것. 두번째는, "境"은, "根" "識"과 만나는것 때문에 變異 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보여 진 적이 없이 피어 난 한송이 꽃이라도, 누군가의 根과 識과 만나게 됨으로서 백합이라는 꽃으로 탄생 분별 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변화하게 되는 점을"變異해서 分別 된다" 라고 한다. 세번째는, "觸"이라는 말은, 피부감각 =신식(身識)의 대상 을 나타 낼때 사용하는 말로 쓰는 경우가 많다. 즉 觸境이라고 하는 형태로 사용되는 경우 이다. 오히려 遍行속의 하나로 사용되는 편은 드믈다는 것이다. "觸"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는 그것을 확실히 식별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2). 作意. 警覺(경각)이라고도 한다. "마음"이 일어 나면서, 특정한 방향을 향하여 집주 되는 상태를 말 한다. 우리들의 인식은, 눈 앞에 나타난것을 누구라도 같은 대상으로 보게 된다고 하는것 같은 단순한 구조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편에서 "본다" 든가, "알려고 하는것" 같은 능동적인 작용(働)이 있기 때문에, 인식이 처음으로 특정한 방향으로 일어 나게 된다는 것이다. 능동적인 작동(作働)이 없는경우는, 무엇을 보아도 보게 되지 않고, 들었어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지나치게 가지게 되면, 무엇을 보든지 자기 입맛에 맞게 외곡시켜 버린다. 바르게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란 참으로 알기 어려운 부분 이다. 이렇다고 할 때, "觸"과 "作意"라고 하는 이 두개의 心所의 전후관게는 어덯게 된다는 것일까. 먼저 "觸" = 접촉 이 있고, 다음으로 "作意" = 마음이 일어 난다 라고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데, 逆(거꿀 역)으로 먼저 "마음"이 일어나서 그것으로 인하여 "觸"이 성립되었다고도 생각 할 수도 있겠다. 흥미도 관심도 없는것은 보아 넘기며, 말아 버리고, 들어도 그냥 흘려 버리고 만다. "作意"가 먼저 라고 할 수도 있겠고, 보아 넘긴다든가, 들어도 그냥 흘러 버린다 하더라도, 어쨋던 대상은 대상으로서 떠 오른다고 하는 "觸"의 일면이 선행하고 있는것 같이 보인다. A 가 있어서 B 가 있다고 하는것 같은 載然(재연)과 분석이 되게 되는것 같은 것이 아니라, 시실은 "觸" = "作意", "作意" = "觸"이라고 하는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것이 아닌가 해 본다.
3). 受(수). 領納(거느릴 영,받아드릴 납)이라고 주석 한다.받아드린다는것, 우리들은,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드릴 경우, 자기의 감각과 감정을 섞어서 받아 드리게 된다. 객관을 그 자체로 받아 드린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의 好惡(호악), 취미, 기호 같은 것을 함께 轉嫁(덮어 씨워서)하며 受入(받아 드린다) 한다는 것이다. 외부로 부터의 정보를 수입하는 경우, 唯識은 거기에 감각, 감정과 같은 작동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식의 성립에 감각과 감정이 큰 역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受"에도 三受와 五受가 있다. 이의 분류를 보면, 3受에는, 苦(고), 樂(락), 捨(버릴 사)의 3개. 5受에는, 苦,樂,憂(근심할 우),喜(기쁠 희),捨 의5개.
"五受"에 관하여 말하면, 苦 와 樂은 감각영역, 憂 와 喜는 감정영역에 속한다. 識과의 관계에서는 苦樂 "前五 識"(안이비설신), 憂喜는 第六意識의 움직임이 되겠다. "捨"는 非苦非樂(비고비락), 非憂非喜(비우비희)가 되겠다. 佛敎에는 이러한 성질의 분야를 따로 만들어서, A 인가 B 인가, 是 인가 否(아닐 부)인가 와 같은 二支受擇(이지수택)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면이 있다. 동양의 재미있는 일면 이라 하겠다. 일상생활을 도리켜 볼 때, "善"도 "惡"도 아닌 상태가 종종 있는데, 인간의 현실 상태에서 볼 때 무리 없는 자연적인 파악이라고 생각 한다. 또 "受"는 "愛"를 불러 온다고 하는 측면이 있는데, 佛敎에서는, "愛"라고하는 말에는, (1) 푸레만, (2) 도리이 쥬나 라느 두가지의 뜻이 있는데, 전자는 "선한 사랑", 예를들면 "愛語(사랑스런 말)와 같은것. 후자는 "나쁜 사랑", 즉 집착을 의미하는 사랑이 있다. "受"는 "愛"를 불러 온다는 경우의 "愛"는 후자의 경우를 의미 한다. 그렇다고 할 때, "愛"는 우리들의 인식 과정에서, 자의적인 감각, 감정이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게 되는 이유 인데, 객관적, 보편적 인식의 성립과 별개이 입장에 서게 된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4). 想(상). "取像(취상)"이라고도 한다. 우리들의 인식은, 외부로부터 수입 된 정보를 받아 신적(身的)으로 수입하는것 만으로는 성립 되는것은 아니다. 내면으로 부터 적극적으로, 먼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범주 안에서, 그 정보를 분석 정리하면서 이해한다고 하는 면을 말 한다. 그것을 여기서는 "取像"이라고 한다. 表象作用(표상작용)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表象作用이란, "현재, 이 순간에 지각(知覺)하고 있지않은 사물과 현상에 대하여, "마음" 으로 그려보는 像(형상 상)" 을 말 한다. "想"이란, 많은 것을 정리하면서 이해하려는것 만은 아니다. 第六意識의 경우, 그것을 분석하고 분류함과 동시에 거기에 언어를 부여하게 된다. [成唯識論(성유식론)]에서는, 이것을 "名言을 시설 한다"라고 기술 하고 있다. 즉 외부에서 들어 온 정보를 내면에서 분석 분류하고, 거기에 言語(언어)를 붖쳐서, 처음으로 인식을 완성 한다는 뜻 이다. 정보가 들어 오면 그것의 정리 분석은 동시에 일어 난다. Computer가 수입된 Program 에 의하여 즉석에서 정보를 정리하는 것과 아주 근사 한 것이다. 이 경우, 이미 부여 된 Program의 능력범위의 것들은 정리 분류가 되겠지만, 그 범위를 넘는것에 대해서는 수입이 안된다는 것이다. 의사의 진단과 병명이 결정되고 나면 장차 어찌 될 것인지를 알기전 까지는 안심이 되지않아 불안하다. 佛敎에 접촉 할 때도, 우리들은 자기의 능력범위내에서 접촉하게 된다. 그 틀을 초월 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곤란 하다는 것이다.
5). "思(생각할 사)". "造作(조작)" 이라고 주석 한다. 의지적 영역이 되겠다. 인식된 대상에 대하여, 행동을 이르키는 "마음"의 작용(働) 이다. 인간의 행위를 身業(신업), 語業(어업), 意業(의업)의 셋으로 나누어 보는 방법이 있는데 그 경우, 意業을 "恩業(은업)이라고도 한다. 거기서 생겨 난 身業, 語業을, 恩業에서 생겨 난 것이라는 의미에서 "恩己業(은기업)"이라고 하고 있다. 이때에 "思"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恩(은혜 은)"의 心所(마음) 이다. 인간의 행동에서 善惡을 그 동기의 방향에서 보는 "動機論(동기론)" 과 그 결과로 부터 보는 "結果論(결과론)"으로 분류하게 되는데,
佛敎에서는 "動機論"을 선택 한다. 여기서 묻게 되는것은, 어떠한 결과를 갖여 왔는가가 아니라, 어떤 동기에서 얻었느냔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5가지가 五遍行, 이것은 문자 그대로 遍行, 두루두루 돌아가며 작용한다는 心所 인 것이다. 어떠한 "마음" 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작동하는 한은 遍行의 心所를 떠나는 경우는 없다. 阿賴耶識은 인간 심층에 잠재하고 있는 "마음(心所)의 영역으로서 不可知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인간의 심층(심리)이지만, "識"이라고 불리워 지는 한에서는 對境(대경)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受入(수입)하며, 그것에 작용(働)을 건다고 하는 움직임을 가지게 된다. 그러 한 움직임이 觸 作意 受 想 思 라는 것이다. 이러한 遍行의 敎說로 부터 우리가 두가지를 이해 했으면 한다. 그 하나는, 인식의 성립은 知 情 意 3 영역에 의한 종합으로 인하여 완결 된다는 것이다. "觸" "作意"에 대해서 어덯게 판단해야 좋을까는 즉석에서 결론을 내리기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는데, 적어도 "受"는 감정, "想"은 지성(知性), "思"는 의지(意志)라는 분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이렇게 볼 떄, 우리들의 인식이란 知情意의 전 영역을 통틀어서 전인격적총합적인 작용(働)에 의하여 완성하게 된다고 보고 이해하여야 하겠다. 즉 緣起(연기)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수동적 일면 과 능동적 일면이라든가, 호연일체가 되어 인격이 완성 된다고 보게되는 관점 이다. "觸"에 "作意" 라는 순서를 결정하게 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고, "受"는 척 볼 때 수동적인 작용(働)같이 보여지지만, 자세히 보면, 好 不好의 감각 과 감정은 오히려 적극적 내지는 능동적으로 취사선택이 관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좋와하는것을 싫어하는것으로 본다든지,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좋게 본다는 것과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13. 생존(生存)이란 非苦非樂(비고비락). 捨受(사수) 第 三 頌, 四 句
相應唯捨受 오직 捨受 만이 相應 한다.
"捨受"란 전술 했던것과 같이 非苦非樂 非憂非喜 이다. 그렇다고 할 떄, 阿賴耶識은 三受 ,五受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라고 하는 문제 이다. 그 답은 "捨受". 즉 생존이라고하는 사실의 밑바닥은 "苦" 도 아니고 "樂" 도 아니라고 하는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苦 樂 어느쪽도 아닌 생존위에서 苦樂 과 憂喜 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唯識에서의 인간 이해 이다. 그런데 佛陀의 四聖제설에 따르면, 제1은 "苦聖제". 즉 인생은 "苦"에서 출발 한다는 것이다. 阿賴耶識에서 말 하고 있는 "捨受"라고 하는 唯識의 이해는 그것과는 얼마쯤은 벗어 나 있는것 같이 사료 된다. 십중팔구는 생존 한다는것과 그 생존 위에서 전개되는것 과의 구별은, 그렇게 자세하게 진전 한다는것은 아닌듯 하다. 보통 "捨" 라고 하는 인식은, "苦" 라고 하는 방향과 동시에 "樂"이라고 하는 방향도 시준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다. 佛敎에 있어서 苦樂의 문제는, 대단히 심원한것(중요한것) 이라고 생각 된다. "구원을 받는다" 든가 "도움을 받는다" 고 하는것은 , 생의 마즈막에 평온 해 진다고 하는 것, 지적인 이해라기 보다는, 감각적. 감정적으로 안락을 얻는다는 것일 것이다. 편안한 모양으로 살아 가고, 편안하게 佛道(불도)를 배우고, 평온하게 죽는다, 그것이 佛敎와 만난다는 우리들의 생사(生死의 이상상(理想相) 인 것이다. "苦樂"의 관점은, 보는 쪽에서 보면, 표층의 相(모양)과 같이 생각 할찌도 모르는 문제이겠지만, 사실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는, 심각한 것이 되겠다. [唯識三十頌]도 마즈막 三十頌에서 "安樂(안락)"이라고 하는 말을 들추어 내 세우면서 종교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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