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1 11:14
16. 激流(격류)와 같다. 恒轉如爆流(항전여폭류), 항상(恒)돌아가는것이(轉) 爆流(폭류) 와 같다(如).
恒轉如爆流(항전여폭류), (第四頌 三句)
阿賴耶識은 항상 격류와 같이 움직이며 멈추지 않는다. 멋진 일절 이고, 아주 멋진 비유 이다. "三十頌"중에서, 비유가 사용 된 경우가 두번 있는데, 그 하나가 여기에서의 恒轉如爆流이고 다른 한곳은 第十五頌의 如濤波依(여도파의)이다. 두쪽 다 "물(水)"이 비유로서 사용되고 있다. "爆流"란 격렬하게 흐른다 폭발하듯 흐른다 라는 뜻이다. 폭포인가, 대하(大河)인가. 아니면 지금도 떄떄로 볼 수 있는 홍수(洪水)를 말 하는 것인가. 阿賴耶識이란, 이와같은 폭류와 같이 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서 아무런 제어도 받지 않고 격렬하게 흘러 오기도 하고 흘러 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단절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것도 아니다. 즉 非常非斷(비상비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 인간들의 삶의 실상(實相, 참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 인상 깊은 비유에 대하여 [論]은, 三義로서 기술하고 있다.
제 1은, "無始의 時(때도없이)를 따라서 이것은, 生滅(생멸)하고 相續(상속)하면서, 有情(유장)을 漂溺(표익)하면서 出離(출리)하지 않느다"라고 하고 있다. 輪廻(윤회)의 主體(주체)라고 할 수 있는 一面(일면) 이겠다. 생명 이라든가, 유전자라고 불리우는 것에 근사한 見方法(견방법)이라고나 할까.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본다면, 보통 나라고 하는 개체가 있어"서, 그것이 阿賴耶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명, 유전자를 중심에 놓고 보게되면, 생명, 유전자라는것이 있고, 그것이 어떤 개체와 결합하여, 그 개체를 개체화 한다. 라고 보게되는 방법도 가능 하다는 것이다. 어떤떄는 "A"라고 하는 인격과 결합 하고, 그런데 "A"가 죽고나서는 그곳을 떠나 "B"라고 하는 개체로 갈아 타고 이동 한다. "B"를 "B"화 한다. 그러한 개체와의 관계를 무궁토록 계속 해 간다. "有情"을 漂溺(표익)하면서 出離(출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표현은, 윤회의 주체로서의 阿賴耶識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는것 같이 보인다. 한계가 있는 개체의 존재에 대하여, 그것을 초월한 무한의 주체로서 阿賴耶識을 포착하는 것이다.
제2의 의의는, 그런 阿賴耶識이 緣(연)과 접촉하게 되면 구체적인 개체로서 現起(현기)하게 된다고 하는 角度(각도)이다. 격류가 바위에 부디치던가 바람과 만나게 되면, 천변만화 하면서 여러 형태의 白浪(백랑, 흰물결)을 이르키는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阿賴耶識이 주체가 되어 포착 된다는 일면 이겟다.
제3은, 폭류(홍수)가 상류로 부터 여러가지 물질을 밀어부치며 흘러 오는것과 같이, 阿賴耶識은 구원의 과거의 세계로 부터의 인간의 營爲(영위)를 포장하여, 한시도 멈추지 않고흘러오고 흘러간다 라고 하는 것이다. 실로 최고의 阿賴耶識의 비유라고 생각 한다. 인간의 생명의 무게와 깊이의 깊은 뜻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17. 阿賴耶識이 消滅(소멸) 할 떄. (第四頌 四句)
阿羅漢位捨(아라한위사), 阿羅漢(아라한)의 자리에(位)에 이르면, 阿賴耶識은 쓰잘떄 없는것이 되어 버려지게 된다(捨). 이 일절에는 두가지의 문제가 있다. 하나는, 阿羅漢位란 무엇이며, 다른 하나는 "捨, 버릴 사"라는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문제 이다.
1. 阿羅漢位(아라한위)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1) 三乘無學果(삼승무학과)라는 位(잘리)의 說. 2) 第八不動地(제팔부동지) 이상 이라고 하는 位의 說 이다.
1)의 三乘無學果라고하는것은, 聲聞(성문) 四(견혹)向四果(사향사과) 즉 預流向(예류향) 預流果, 一束向(일속향) 一束果, 不還向(불환향) 不還果, 阿羅漢向 阿羅漢果의 최고자리 를 말 한다. 여기서 聲聞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듣고 학불도(學佛道)를 하는 사람"생소하지만 진지하게 하나하나를 듣고 수행을 하나씩 쌓아 가는 사람들을 말 한다. 그 聲聞이 지적으로無常(무상), 無我(무아)이 진실에 각성하여 見惑을 끊은 단계가 "預流"인데, 거기서 이것을 더 더욱 깊이 파고들어 조감(條感)마저 끊고, 三界(욕계 색계 무색계)의 感 마저 남김없이 모두 끊게 되면, 無常, 無我를 체득하는 지혜를 구비하게 되는 그 자리가 "阿羅漢果"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我執(아집)에서 해탈(解脫)한 뛰어난 인격이 완성자를 가르킨다. 이들은 (1)應供(응공, 공양을 받을 자격을 가어 가진자), (2) 殺賊(쇠적, 我執을 끊어 없이 한 자) (3) 不退(불퇴, 후퇴하여 다시는 我執을 가지지 않는 자)를 말 한다. 이들에게 결점이 있다면 利他行(이타행)이 약하다는 것이다.
2) 는, 第八不動地 이상의 菩薩(보살) 이다. 菩薩의 수행에 관해서는 뒤에 나오는 修行論에서 자세하게 배우게되겠지만, 無常 無我를 會得(회득) 한 후, 十段階(십단계)를 올라가면 佛果位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을 "十地"라고 하는데, 그 제 8지가 不動地, 여기까지 도달한 菩薩들은 我執을 나타내는 일은 없다고 한다. "菩薩"에는, 漸悟菩薩(점오보살)과 頓悟菩薩(돈오보살)이 있다.
1. 漸悟菩薩이란, 聲聞의 수행을 시작으로 阿羅漢果에 도달하고, 利他行에 결함이 있다는것을 깨닫고, 利他行을 존주하는 菩薩의 수행에 재출발하게되는 菩薩을 말 한다. 聲聞의 수행을 거친다고 하는것에서 "漸悟"라고 부르게 된다. 또 聲聞의 수행에서 菩薩의 수행으로 전향했기 때문에 "廻少向大菩薩(회소향대보살)"일고도, "廻心向大菩薩(회심향대보살)"이라고도 한다.
2. 頓悟菩薩은, 위의 점오보살과는 달리, 聲聞수행을 경유하지 않고, 처음부터 自利利他의 兩方의 菩薩行을 수행 한다. 이런 종류의 菩薩은 我執을 등에 지고 수행하기 때문에, 제 八地에 도달 할 때까지 我執의 청산을 그냥 가지고 있게 된다. 여기서 생각하게되는 점은, "漸悟의菩薩"과 "頓悟의 菩薩"의 自利行과는, 말은 같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는 것이다. 즉 漸悟의 自利行은 自利行을 완성하고 나서 利他行을 포함한 수행을 시작 할 때는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고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漸悟菩薩"은 聲聞의 수행에서 어찌됬던 阿羅漢果에 까지 도달 해 있기 때문에, 自利行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수행은 완성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菩薩의 수해을 시작함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우위조치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교설에서는 그렇게 말 하고 있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利他行을 포함한 自利行은 自利行만의 自利行과는 문다상으로 볼 때는 같지만 내용면에서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닐까 해 본다. 자기 해탈을 일념으로 추구하게 되는 聲聞의 수행은, 처음부터 他에의 경의를 가슴에품고하는 수행과는 질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捨"란 무었인가. 여기서 "捨"라고 하는 의미는, 제 8 식의 "阿賴耶"라고 불리우는 성질이 버려진다는 것이다. 제 팔識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阿賴耶"라고 하느넛은 무엇인가. 앞에서 배웠던것과 같이 그것은 "아리야"라고 하는 인도어의 음사로 '저장한다' 라고 하는 말로서 "藏識(장식)"이라고 번역 했다. 그렇다고 할 때, "藏"은, 1)能藏, 2)所藏, 3)執藏을 3藏을 이르게 되는데, 1) 2)는 경험이 구조이고, 3)은 인간의 심층에 잠재 해서 我執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성격의 일면을 가르키고 있다는 구조가 된다. 더러워 진 의식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것은, 대상 자체에 더러워짐을 불러 이르킨다고 하는 의미가 된다. 순수무후한 청정한것이 오염 심정을 이르킨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오염된 심정을 이르킨다고 하는것은, 대상자체에 그것과 같은 동질의 성질이 있엇기 때문이란 것이다. 我執의 근원에 작용(働)하는것은 "末那識"이지만, 그것이 대사으로 하는 것이 阿賴耶識이라고 하는 것임으로, 第八識에 그것을 유인하는 서질이 잇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捨"란 그러한 제 8識의 일면을 버려 버린다는 것이 되겠다. 즉 阿羅漢果에 도달한 사람과 菩薩十地의 第八不動地에 도달한 사람들은, 我執을 끊어 내야 하는 것 같은 성질은 이미 없어 지게 된 것임으로 그것을 가르켜 "捨"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1). 漸悟菩薩은, 阿羅漢位
2). 頓悟菩薩은, 第八不動地
거기서 아집의 대상이 되는 '아라야" 성질이 초월된다는 것이다. 我執의 대상이 되는 면이 사라졋다고 하는 것은, 我執을 이르키는 자기가변화 되엇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8식이 변해다는 것이 되고,동시에 我執에 대한 적극적인 역활이 끝났다는 것이 됨으로 제7識마저 변화하게 된다는것을 의미 한다. 결국 자기가 근원적으로 변화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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