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30송" 현장삼장법사 역

2025.02.22 12:10

김일하 조회 수:1

1. 自己(자기)에 執着(집착)을 계속하는 自我(자아),  (第五頌(제5송)~第七頌(제7송).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第五訟에서 第七訟은 第二能變 = 末那識(마나식) 이다. 初能變(초능변)이라고 하는것은, 第八阿賴耶識(제8아뢰야식) 이 었다. 우리는 그것을 藏識(장식)이라고 번역 했던 것과 같이, 자기만의 과거의 경험을 하나씩 둘씩 쌓아 가면서, 미래를 향하여 살아가게 되는 인격의 뿌리가 되는 "마음" 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자기만의 과거라고 하는것은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의 공간소게 살면서 경험한 모든것을 말 한다. 과거라고 할때는, 공통된 과거(환경)도 있지만, 그 사람의 독자의 과거도 있겠다. 어떤 점에서는 공통의 세계가 갖게되는것, 또다른 어느 점에서는 그 사람의 독자의 특수한 세계가 있겠고 그러한 세계를 살아 가게도 된다. 즉 한사람 한사람이 나름대로 독자의 자기 삶을 살아 가면서 자기의 환경을 가지게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은 사람과연결되어 있어서 공통의 이해를 갖게될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어떤 면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다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사람이란 한정된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살아 가고 있다는것이 되겠다. 즉 무조건 열린 세계에서 서로 교통하며 살고 있는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初能變(제8식) 위에 第二能變 末那識을 더 갖게 된다는 것이다. "末那識(제 7식)" 이란, 자기중심적인 성질을 축으로 한 "마음"이기 때문에, 그것은 初能變(제8식)으로 인해 좁여진 세계를 좀더 좁게 만든다(狹溢化)는 것이 되겠다. 그렇다면 "末那(마나)란 무엇인가, "末那"란, 梵語(범어) '마나스'의 음사어(音寫語), 생각을 저울 질 한다. 

思量(사량) 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의미 이다. 즉 "생각을 저울 질 한다" 라는 것이다. 이 "마음"의 본성 이기도 하다. 즉 현실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第五頌 四句의 "思量하느것을 性과 相으로 한다"라는 것은 이를 가르키는 말 이다. "阿賴耶識"이 "축적한다" 고 하는 기본 성질이라는 것에 대하여, "末那識"은 "思量한다"라고 하는 것이 전부 이다.그렇다고 할 때, "思量한다" 라고 하는것은, 무엇을 어덯게 思量한다고 하는 것릴까. 그것이 이하 기술 할 末那識論이 되겠는데, 한마디로 말 한다면 "自我" 즉 니만을 思量하며 이를 계속 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다.자기에 拘泥(구니)하며 자기를 축을 해서 자기만을 思考(사고)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成唯識論]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思量하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하여 응답하면서 "恒(항상)으로 審(소상하게 자세하게 살핀다) 하면서 detailed하게" 思量한다고 기술 하고 있다. "恒으로" 라는것은, '언제나 '라고 하는 말 이므로, 잘때나 깨어 있을 때도 언젠나 작용(働)을 계속한다는 것을 의미 하게 되는데, 善한 행위를 할 때도, 惡한 행동을 할 때에도 당연히 포함되기 때문에, 善의 행위에도 惡의 행위에서도 自我에의 집착이 잠재 해잇게 된다고 지적하게 된다는 것이다. 自我중심적인 움직임이 때문에, 惡의 행위속에 잠재하게 되는거은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善의 행위인 경우 이다. 唯識은 善意(선의)로 가득한 행위속에도 自我중심적인 "末那識"이 관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唯識에서는 前六識(眼耳鼻舌身意識) 을 有間斷(유간단, 작용하지않을 때가 있다) 라고 하는것에 대하여, 末那識은 恒으로 = 無間斷(무간단, 언제나 작용한다)이라고 하고 있다. 自己로서는 善意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데도, 그 속에는 "末那識"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송득(損得)을 계산하고 있게 된다는 것이다. [成唯識論]에서 말하고 있는 "審(심)으로"라고 하는것은, 自我중심의 계산을 말 하는 것이 되겠다. "恒(항)으로"라고 하는 末那識의 움직임이란, 前六識의 有間斷이라고 하는 서질과는 대조적이지만, 阿賴耶識 과 비교 해 본다면, 공통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외냐하면 阿賴耶識도 恒으로 작용(働) 하으로 無間斷의 "마음" 이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그러에도 이 두 마음은 다른데, 그렇다면 어디에 다른점이 있다는 것일까. 묻는다면, 그것은 이 "審으로"라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阿賴耶識은 "恒으로" 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末那識" 과는 공통닌데, 그러나 사물을 "審으로" 생각한다고 하는 점에서 점에서 볼 때, 阿賴耶識은 그러한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즉 末那識의 이기성이 阿賴耶識에는 없다는 것을 말 한다. "恒으로" 라는 글자로서 前六識이 末那識과 다른점을 명확히 하고, "審으로"라는 말로서 阿賴耶識과의 다름을 명확히 한다는 것이 되겠다. "恒審思量"이라고 하는 四字는 末那識을 독자의 것으로 하는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末那識"은 이 [唯識 三十頌]에서 조직적으로 포착 된 인간관 속에서 처음으로 그 위치를 부여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되기 전 까지는  잠재적인 我執(아집)이 마음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들면 無着菩薩(무착보살)의 [攝 大乘論(섭 대승론) ㅇ에는, "染汚意(염오의)"이라고 하는 말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 이다. 명료하게 末那識을 가르키고 있다고 해석 해도 맞는 표현 이지만, 阿賴耶識과는 별개의 거으로 포착하고 잇는것인지,아니면 阿賴耶識의 작용속의 한 부분인지 하는것이 명료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無明(무명, 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성)" 의 분류에도 "恒行不共無明"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唯識에서는 이것이 末那識에 작용(働)하는 無明이라고 하고 잇다. 즉 "恒行不共無明"과의 연관속ㄱ에서 末那識의 독립성을 시준(示晙)하고 있는것 같이보이지만, 이거 역시 딱 부러지게말 하고 있지는 못 하다. "第二能變" "恒審思量" "末那識"과 같은 사상의 배후에는 긴 종교적체험의 추적의 중복과 교학이 사색의 역사가 잠재 해 있다는 것인데, 世親菩薩(세친보살)의 그와같은 흐름을 받아서, 자기 마음 밑바닥에잠재하고 있는 깊고깊은 집요(執拗)하게 我執(아집)을 시원스럽게 끊어 내어, 인간 구조속에 위치를 부여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唯識三十頌]의 第二能變 末那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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