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6 11:56
2. 彼에 의하여 彼를 緣한다. 所依, 所緣 (第五頌 三句)
依彼轉依緣 彼(저피)에 依하여 轉해서 彼를 緣 한다.
第八阿賴耶識을 依所로 하여, 그 阿賴耶識을 對象(대상)으로 한다. "彼(저피)" 라는 두 글자는 모두 第 八 識 . "轉(구를전)"이란, 轉起(전기) 한다는 뜻, 즉 먼저것이 움직여서 먼저것과는 다른것이(별개의것) 된다는것을 말 한다. "緣(인연연)"이란, 여기서는 대상(對象)으로 한다는것을 말 한다. 즉 第七末那識은 第八阿賴耶識을 依所(의소)로 하여, 第八識이 작용(働)하여 그것을 轉起(전기) 시켜 第七 末那識이 된다는 것이다. 그 모체였던 阿賴耶識을 대상으로 해서 自我(자아)의 허상(虛象)을 구화(構畵)하고, 거기에 집착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구조로 末那識은 포착 되게 된다. "末那識"은, 지속적이고 잠재적인 아집(我執)의 "마음" 이다. 染汚意(염오의,오염되었다)라고 불리우듯 결코 청정(淸靜, 깨끗한 마음)한 '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러한 "마음"은 어덯게 어디서 생겨 나는 것일까. 그것은 阿賴耶識으로 부터 생겨 난다. 다른 사상계열에서는, 인간은 원래적으로는 청정하게 태어난 것인데, 煩惱라든가 我執이라고 하는 minus적인 성질이, 제멋대로 외부로부터 날아 든 먼지와 같은 우연한것들 때문에 染汚(더러움에 물들다)되었다는 것이다. 그런것을 가르켜 "人本淨客塵煩惱 " 라고 표현 하고 있다. "客塵煩惱" 라고 하는 말에는, 우연성의 성질이 강함으로, 바람같은 것으로 불어 날려버리면 깨끗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 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것에 비교하며 唯識은, 我執을 자기내면에서 轉起한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즉 이러한 minus성질이 외부로부터 온것이 아니라 자기내면의 것으로 포착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기성(利己性)은 우연히 외부로부터 달라 붙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근원(근본)에 관계한 것이라고 하는 인식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요한 자각이라고 하겠다. [成唯識論]은 이것을 "俱有所依(구유소의)"라고 하는 교설(敎說)로 조직적으로 논술하고 있다. 이러한 護法正義(호법정의)를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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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識(팔식) 俱有所義(구유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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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五識 1. 五色根 (同境依)
2. 第六意識 (分別依)
3. 第七末那識 (染淨依)
4. 第八阿賴耶識 (根本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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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意識 1. 第七末那識
2. 第八阿賴耶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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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末那識 第八阿賴耶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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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阿賴耶識 第七末那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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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俱有所依"란,"현재"라고하는 순간의 8식에 모든것들이 무엇을 依所(근거)로 하여 있는가를 나타 낸 교설 이다. 예를들면, 도표의 前五識의 본란을 보면 1. 五色根 즉 신체와 2. 第六識, 3. 第七識, 4.第八識의 三識(합계 4항목이 거론 되고 있다). 前五識속의 眼識(視覺을 예로 할 떄, 먼제 眼根(안구, 시각신경)이라고 하는 신체적 기관을 依所로 한다는것. 그 위에 第六,七 ,八 識이라고 하는 세개의 "마음"이 작용(働)하여 眼識을 도와주면서 처음으로 시각작용이 완성 된다. 五感(5감,眼耳鼻舌身,안이비설신)은 제각기 신체적 기관에 지지(支持,도움을받다)되어 있음으로, 신체적 기관은 五識과 같은 대상에 관계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同境依(동경의)라고 부르게 된다. 五感에의하여 수용된 정보는, 第六識에 의해 식별되고 판단 되기 때문에, 五感에 대하여 第六識은 그 심층에 작용(働)한다는 의미에서 "分別依(분별의)"라고 하게 된다. 第六意識은 심층에 작용(働)하는 第七末那識을 依所(근거)로 한다. 末那識은 我執(아집)의 "마음"이기 떄문에, 第六意識은 我執을 依所(근거)로 하게 된다. 그러나 그 我執은 자각되면서 자기전환의 동기가 되면서 染淨(오염, 깨끗함)양편의 依所(근거)가 되게 되는 것임으로 "染淨依(염정의)라고 부른다. 第七末那識은, 第八阿賴耶識을 依所(근거)로 하게 된다. 第八阿賴耶識은 인격의 근본 依所(근거)가 됨으로 이를 "根本依(근본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前五識의 "俱有依所(구유의소)는,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잘 나타내고 있게된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사물을 본다"라고 하는 시각작용은, 대체로 일단(一應)은, 지극히 표면적인 "마음"의 작용(働) 이라고 하게 되겠다. 그러나 "俱有依所"라고 하는 교설은 그런 일견단순하게 보여지는 한 "마음"의 움직임 임에도, 그 속에는 인격의 전체와 관계하고 있다는것을 見取(견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송이의 꽃을 보는데도, 우리들은 오늘, 지금의, 자기의 전력을 바친다는 것이다. 즉 지금, 무엇을 보고있는가 라고 하는것에 그 사람의 전인격이 露呈(노정,들어나 있다)되어 있다는 것이 詠嘆(영탄)으로 끝이 나고 만다는 것이 겠다. 중요한것은, 우리들은 그런 인생을 180도 전환시켜 긍정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第八識과 第七識이, 상호 "俱有所依"가 되어 만난다고하는 주장은, 이러한 문제에의 수단을 부여한다는 것과 같이 생각 하게 한다. 다음은 "緣依" 즉 ""彼를 緣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즉 末那識의 대상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문제 이다. "彼(저피)"라는것은 第八阿賴耶識이라고 하는 주석(註釋)을 한다. 즉 末那識은 阿賴耶識을 대상으로 해서 작용(働)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成唯識論]에 따라 좀 더 정확하게 말 한다면, 第八阿賴耶識의 "見分(견분)" 이라는 것이다. 第八阿賴耶識에서 생겨난 末那識은, 阿賴耶識은 依所(근거)로 하면서, 그 阿賴耶識의 "見分"을 대상으로 해서 거기에 自我라고 하는 허상(虛象)을 구화(構畵)하고, 거기에 愛着(애착)을 계속 하면서 집착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成唯識論]이 이 말하고 있는 "見分"이란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四分義(10. 인식의구조,제3송 1, 2 句)에서와 같이, 唯識에서는 心, 心所 하나하나에 "四分"이 있다고 했다. "四分"이라고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働)을 분석하는 방법인데, 근본적으로는 四分 대부분이 "마음" 속에 포섭 되게 된다. 당연히 "相分" = 대상도 "마음"속에 포섭되게 된다. 대상이라고 해서 결코 "마음" 밖에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지 假(인연에의하여생겨난것)의 四分을 內(내) 와 外(외)로 나누어 본다면, "相分"은 外(외)이고 "見分" "自證分" "證自證分"의 三分 은 內(내)가 되겠다. 그 중에서 "見分"은 내측(內側)의 최선단으로서 대상의 相(모양)으로 대하는 것이 되겠다. 즉 阿賴耶識의 "見分" 이란, 阿賴耶識의 최첨단이 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인격의 최첨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인격의 최첨단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의 자기의 최첨단이라는 것이다. 관념적인 자기라든가, 상상적인 심상(心象)으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며 먹고, 자고, 배설 하면서 살고있는 자기의 구체적인 相(자태,모양)인 것이 되겠다. 禪(선)에서 말 하고 있는 臭皮袋(취피대, 냄새나느 가죽 주머니 즉 몸뚱아리)인 자기 라는 것이다. 末那識은 거기에 더하여 我執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되겠다. "末那識"은, 그런 구체적인 생존의 자기에 집착 하게 된다. 그것을 "隨生繫(수생계)"라고 부른다. 第七頌 二句의 "隨所生所繫(수소생소계)" 의 句는 이를 두고 하는 頌 이다. 末那識의 我執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길을 걸어가는 보행자인 자기에게는 자동차가 방해가 된다고 하고, 자기가 자동차를 운전 할 때는 보행자가 방해가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정말 자기 멋대로의 것이 末那識의 我執 이다. 이것을 "第七末那識은, 第八阿賴耶識의 見分과 緣(因緣)하여 自心의 相(모양)을 起(일어날 기)한다" 라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어떠한 상태로 변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는 조곰도 변하지 않는다는 평상심(平常心底)이 "마음" 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佛陀의 가르침을 받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자태라는 것이 되겠다. "思量爲性相(사량위성상, 第五頌 四句)" 思量하는 것을 性(성질)으로 相(모양)으로 한다. 思量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識의 본성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구체적인 相(모양)이기도 하다. 我라는것을 기본으로 하여 思量(생각을 저울질하며)하게 되고 그것을 계속 한다. 그것이 이 末那識의 본성이기도 하고, 또 그것이 전부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의 1.에서 기술 하였음으로 더 이상 말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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