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30송" 현장삼장법사 역

2025.03.07 10:24

김일하 조회 수:0

4. 남의 "마음"도 같이 (제6송 4句)

    及余觸等俱(급여촉등구)   또(及) 나머지(余) 觸等(마음) 과도 같이(俱)한다.

또한 다른 觸等(마음들)의 心所(심소) 들과도 같이(俱) 작용(働) 한다. [30송]에서는"觸"이라는 이름이 거론 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18心所(마음)가 俱轉(구전)한다는 것을 말 하려고 하는 말이 되겠다. 거기에 관하여 간단히 기술 하겠다. "等"이라고하는 복수를 나타내는 "글자"는 18心所를 가르키고 있다.

1). 遍行(편행)의 5 心所.

  遍行이란, 어떠한 心, 心所가 움직일 떄에도, 반드시 같이 따라 움직이는 心所이기 때문에, 당연히 末那識의 心所와도 같이 작용(働) 하게 된다. 

2). "慧(혜)" 의 心所.

  이 心所는 대분류에서는 "別境(별경)"의 心所중 하나인데, 선택하여 분류한다고 하는 "마음"의 작용(働)을 말 한다. "簡擇(간택)"한다는 작용 이고, 末那識과 같이 작용(共動) 하게 될 때는, 자타의 구별을 확실히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손득(損得)의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즉 저울질 한다, 思量(사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末那識의 心所의 하나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이라 하겠다. 자기에 狗泥(구니, 진흙탕에 푹 빠진 개마냥)하며 자기에 집착하게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항상 자기의것과 남의것을 첨예하게 선별하는 "마음"이 작용(働)하게 된다. 이런것이 "慧(혜)"라는 心所 이다. "慧(혜)"란, 善惡 어디든지 작용(働)하지만 末那識과 같이 작용(働)하는 "慧(혜)"는 善은 아니다.

3). 大隨煩惱(대수번뇌) 8개가 거론 된다.

  이 煩惱(번뇌)의 하나하나에 관하여는 뒤에서 배우는것으로 하고여기서는 그 이름만 열기(列記)하겠다. 탁擧, 惛沈, 不信, 懈怠, 放逸, 失念, 散亂, 不正知의 8개 이다. 唯識에서는, 煩惱를 "근본번뇌" 와 "수번뇌(隨煩惱)로 분류하고, "수번뇌"를 소, 중, 대수번뇌의 3으로 분류하는데, 末那識과 작용(働)하게 되는것은, "수번뇌" 중 "대수번뇌"가 되겠다. "대수번뇌"는, 손을 들어 올린다든가, 성나서 소리를 지르는것과 같은 격렬한 움직임의 번뇌는 아니지만 주름이 잡히는듯 천천히 "마음"을 더럽혀가고 있다. 깊이가 있고 세밀한 것이 末那識에 딱 들어맞는 수번뇌라 하겠다.

5. 染汚(더럽혀 진) "마음" (제7송 1句)

    有覆無記攝  有覆無記(汚心)에 攝(집어넣다) 한다.

善惡等의 三性의 분류에서는 有覆無記가 된다. 末那識을 善 惡 無記의 가치기준에서 볼 때, 어떤것에 속하게 되는가 하는데 대한 답 이다. 末那識을 三性說(삼성설)에 의하면,

"有覆無記(유복무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阿賴耶識은 無覆無記(무복무기)였다고 했다. 따라서 無記(무기)라고 하는 점에서본다면, 阿賴耶識 과 末那識과는 같은 성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阿賴耶識이 "無覆(무복)인것에 대하여 末那識은 "有覆(유복)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커다란 다름이 있다는 것이다. "覆(복)"이란, 앞에서도 본것과 같이 [成唯識論]에서는 "성도(聖道)를 장애하면서 자심(自心)을 은페 한다"라고 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無覆"은 성도를 장애하지 않고, 자심을 은페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有覆은 그 반대가 되게 된다는 것이다. 즉 "末那識"이라고하는 자아의식은 佛道를 장애하여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색의 "마음"의 작용(働)을 은페 한다는 것이다. [攝大乘論(섭대승론)]에서는, "染汚心(염오심)이라고 불리워 지고 있는 것으로, 末那識은 더럽혀 진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惡이라는 말도 아니다. 惡과같이 자타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고 있는 "더럽다"라는 말에 해당 한다. 예를들면, "돈을 더럽게 쓴다" "돈쓰는모양이 더럽다" 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sport 에서 보여지는 더러운(치사한) 승부수 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법칙을 어기는것도 아니다. 어쨋던 제멋대로 어물어물 이기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의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에 末那識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이면 악이라고 확실하게 하고 있다면,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도 확실 해 지겠는데,그 상태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대처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6. 己의 生을 愛한다  (제7송 2句)

    隨所生所繫(수소생소계)  살아가는(생) 곳에(所) 따라서(隨) 맺어(繫) 지게 된다.

    末那識은, 그 사람이 생존하고 있는장소에 繫縛(계박)되게 된다.

앞에서 잠시 언급 했던것과 같이, 末那識의 我執(아집)은 현실의 구체적인 자기에 대하여 작용(働)하는 것으로서 결코, 관념적인것도 추상적인것도 아니다. 그것은 "第八阿賴耶識의 見分(견분)을 所緣(소연)으로 한다" 라고 하는 형태로 보았던 것이다. [成唯識論]은, "繫(맬계)"라고 하는 글자에 대하여, 1).제8식이 생긴곳에 게속(繫屬)한다. 2).그 생겨난 장소의 번뇌에 계박(繫縛,맬계묵을박)된다고 하는 두 뜻을 거론하고 있는데, "末那識"의 자아상(自我像)을 그려내는 대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 장소에서의  그 자기에 대해서 이다. 평사원인 때는 평사원이 아집(我執)을 가지게 되고, 과장으로 승격되면 승격된 그 순간부터, 아집의 내용이 변하면서 과장이라는 자기에 대한 아집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역활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인간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어, 갑자기 사람을 얕잡아보는것 같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佛敎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어떠한 곳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자기가 태어났을 때의 자태가 변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출세를 하고 나서도 평상대로, 신분이 떨어졌서도 평상대로, 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것에 대하여 末那識은, 자기가 생존하고 있는 상태, 장소에 따라서 소리없이 변화변질하는 인간의 실태를 호소하고 있다고 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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